주체성의 경주
투명사회에는 그림자가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자와 나의 구분이 없다. 투명사회에서는 효율성과 통제를 위해 모든 행위를 기록하고 데이터화한다. 국가의 기능이 세분화될수록 개인의 정보가 데이터화되어 '데이터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투명사회의 데이터화는 스스로 소멸할 기회를 박탈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창조할 자유를 상실케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4부 [그림자] 편에서 '주체성의 경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 그림자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람! 뒤쫓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지! 나 계속해서 달아나고 말 것을.... 그리하여 곧 세 명의 달리는 자, 그러니까 맨 앞에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가, 그다음에 차라투스트라가, 그리고 세 번째로, 맨 뒤에 그의 그림자가 앞뒤로 늘어서서 질주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4부 [그림자]中 -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는 지상에서의 행복을 찾는 자로 한 때 차라투스트라였던 모습이다. 하지만 위버멘쉬가 되기에 부족했다. 현실을 자각하고 지상에서의 행복을 바라지만 사랑의 결여로 허무주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독을 되찾기 위해 그를 내쫓으려 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뒤에는 자신의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런 구도가 완성되는 순간 차라투스트라는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를 쫓아내는 것이 아닌 쫓아가는 형국이 되고 만다. 여기서 그림자는 자신의 과거 혹은 현재의 자신을 구속하던 규범으로 볼 수 있다. 그림자는 현재의 자신을 만든 흔적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적인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그래서 그는 이 주체성의 경주에서 이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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