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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습작노트

언어와 피부색을 넘어서는 글의 힘

by 서하린

“쟤, 왜 여기 있어?”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영어였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그쪽을 쳐다보자 그 애는 목소리를 낮춰 친구들과 속닥거렸다. 교실 바닥에 앉아있던 나는 고개를 떨궜다. 11살의 나는 용기가 없었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말을 걸 수 없었다. 그저 바닥 카펫의 보푸라기를 뜯어내며 조회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제인’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만든 영어 이름이었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이름이었다. 내 한국 이름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매번 쥐어짜는 소리로 이상하게 발음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게 실감이 났었다. 아이들은 “반가워, 제인!”이라고 인사했다.


그 반에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처럼 나에게 ‘칭챙총’이라 놀리는 아이들은 없었다. 담임 선생님도 특별히 신경 써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을 때 그게 어디냐고 물었다. 지구본에서 찾아 보여주자 너무 작다며 놀라워했다. 한국어를 궁금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만 영어를 쓰느라, 내가 아는 영어 단어들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글쓰기 시간이었다. 이라크 전쟁에 관해 써야 했다. 한 쪽짜리 글을 완성할 시간이 주어졌다. “발표하고 싶은 사람?” 선생님이 물었다. 아이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두 명의 발표가 끝나고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제인, 이번엔 네가 해볼래?” 나는 글을 읽기 시작했다.


글은 간단한 물음으로 시작했다. ‘전쟁은 왜 일어나야 하나요?’ 그리고 나는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집을 잃고 떠돌게 된 가족들, 동굴에 들어가 숨어 지내야 하는 사람들, 팔과 다리를 잃은 병사들. 전쟁으로 아픔을 겪게 된 사람들이 하루빨리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기를 기원하며 끝났다.


그런데 교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낭독이 진행될수록 주변이 조용해졌다. 다른 아이들이 발표할 때는 작게 잡담을 나누거나 공책에 낙서하던 아이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긴장했다. 뭔가 잘못했나 싶어 두려웠다. 하지만 꿋꿋하게 낭독을 끝마쳤다.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둘러봤다.


“나 네 글이 마음에 들어!” 옆자리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도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선생님과 함께 교장 선생님에게 가서 글을 보여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글 위에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교장이 주는 상이라는 문구가 적힌 금색 스티커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글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언어를 넘어서고, 피부색을 무시하게 한다. 지구본에서 찾기 힘든 작은 나라의 아이에게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칭찬과 상장보다 내게 더 의미 있었던 건 집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곧 내 글에 몰입하느라 그랬다는 걸 알고는 감사했다. 10년 넘게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글을 통해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때부터 나는 꿈이 생겼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같이 감동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감동하는 이유는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몰입하며 읽을 수 있고,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글이 가진 힘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표지 사진 출처]: Photo by CD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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