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면허를 따지 않은 이유
차가 있나요? 아니오.
운전을 하나요? 아니오.
면허가 있나요? 아니오.
보통 두 번째 질문까지는 '아니오'가 나와도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나이가 적으면 차가 없을 수도 있고, 대중교통이 잘 갖춰진 대도시에 살면 굳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질문에 당도했을 때, 혹은 그들이 감히 세 번째 질문은 생각조차 하지 않아 내가 먼저 "저는 면허도 없어요"라고 먼저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그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십여 년 간 목도했다.
나의 주변인들은 수능을 치고 나서나 대학교 방학을 이용해 운전면허를 따는 것을 일종의 관례처럼 여겼다. 설령 운전면허증이 장롱으로 들어가더라도, 주민등록증 말고 다른 신분증 하나 정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따는 듯 했다. 종종 유복한 자녀들은 면허를 따고서 선대로부터 받은 자동차를 몰고 캠퍼스를 드나들었다. 졸업 후 영업직에 취업한 자들은 회사 차를 몰았다. 세상이 좋아져 공유 경제가 도입되자 동네 주차장에 대기 중인 차를 자기 차처럼 몰고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묵묵히 대중교통과 카풀에 내 몸을 의탁했다.
나는 지구 환경을 걱정하는 어린이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배운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나는 딩동댕유치원에서 쉬를 한 뒤에는 휴지 세 칸, 응가를 한 뒤에는 휴지 다섯 칸만 써서 뒷일을 도모하라고 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며 살았다. 아나바다를 실천하고 꺼진 불도 다시 보며 성장하던 어느날, 고등학교 문학 문제집에서 나에게만 문제적인 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김광규
네가 벌써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운전을 배울 때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을
네가 대견스러웠다.
면허증은 무엇이나 따두는 것이
좋다고 나도 여러 번 말했었지.
이제 너는 차를 몰고 달려가는구나.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를 보지 못하고
길가의 과일 장수나 생선 장수를 보지 못하고
아픈 아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을 보지 못하고
교통 순경과 신호등을 살피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구나.
너의 눈은 빨라지고
너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앞으로 기름값이 더 오르고
매연이 눈앞을 가려도
너는 차를 두고
걸어다니려 하지 않을 테지
걷거나 뛰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남들이 보내는 젊은 나이를 너는
시속 60 Km 이상으로 지나가고 있구나.
네가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너무 가볍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이 무거워 진다.
아, 화자는 현대 물질 문명을 대표하는 소재로 자동차를 삼아 편리함만을 추구하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세상을 안타까워하고 있잖아! 나는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도 보고, 길가의 사람들도 보고 싶은데? 차를 운전하면 저렇게 각박한 삶을 살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운전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품고 2010년대를 살고 있었을 때, 내 어린날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지구는 점점 뜨거워고 있었다. 그 현상이 심상치 않았는지 사람들은 기후 위기라든지, 탄소배출 같은 말들을 만들어냈고, 이 단어들은 운전을 하지 않겠다는 내 결정에 큰 정당성을 주었다. 사람들이 면허가 없다는 말에 이유를 물을 때면 "탄소배출을 덜 하면서 살려고요"라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배운대로 살고 싶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치이며 적잖이 고통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타협이라는 것도 하게 되었는데, 운전도 그 중 하나인 것 같다. 마음을 먹기도 오래 걸렸고, 도중에 그만두었다 다시 시도하기도 했다. 운전연습을 하러 가는 길은 즐거운 적이 없었다. 가진 것이 성실 뿐이라 묵묵히 다녔을 뿐. 여전히 기후 위기에 나의 지분을 늘리는 마음은 찜찜하다. 그래도 10년 넘게 운전을 하지 않음으로써 탄소배출을 줄여보았으니, 운전을 해보기로 결심한 지금 조금 덜 미안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