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 2회독.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카뮈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놓쳤을 수도 있으니 더 있다면 알려주시길...)
《안과 겉》(에세이, 1937)
《결혼》(에세이, 1939)..
《이방인》(소설, 1942) - 부조리 3부작
《시지프 신화》(철학서, 1942) - 부조리 3부작
《칼리굴라》(희곡, 1944) - 부조리 3부작
《오해》(희곡, 1944)
《페스트》(소설, 1947) - 반항 3부작
《계엄령》(희곡, 1948)..
《정의의 사람들》(희곡, 1950) - 반항 3부작..
《반항하는 인간》(철학서, 1951) - 반항 3부작
《여름》(에세이, 1954)..
《전락》(소설, 1956)
《단두대에 대한 성찰》(철학서, 1957)..
《행복한 죽음》(소설, 1971)
《최초의 인간》(소설, 1994) - 사랑..
나의 첫 카뮈는 5년 전 ≪페스트≫였다. 작년 2024년 여름에는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연달아 읽었다. 여름에 딱 맞는, 쾌청하지 않고 습하고 갑갑하지만 또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올해, 지금으로부터 딱 일주일 전에 ≪시지프 신화≫를 다른 번역가의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읽었고, 오늘은 나의 첫 카뮈를 새움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고전은 N회독이 필요하다.
≪페스트≫ → ≪이방인≫ → ≪시지프 신화≫ → ≪시지프 신화≫ 2회독 → ≪페스트≫ 2회독
이렇게 한 바퀴를 다시 돌고 나서야 내 뜻대로만 해석하고 만족하고 감동하던 시야가 크게 확장하여 저자를 조금 더 이해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페스트≫는 알베르 카뮈의 반항 3부작 중 첫 타자 장편 소설로,
재앙 때문에 '고립'된 상황에서 '회피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과
도피와 초월적(다른 의미의 회피) 반응을 뛰어넘는 건 '반항적' 반응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인물이 등장한다.
여기서 '재앙 때문에 고립된 상황'은 '이 세계의 현실'이다. 즉, 우리네 세상살이라고 보면 된다.
'회피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사람들'이다.
≪시지프 신화≫, ≪이방인≫ 등에서 카뮈는 '우리는 부조리를 의식하여 행복한 시지프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면,
≪페스트≫ 등 반항 3부작에서는 '그렇다면 우리가 부조리를 의식한 다음에는 실제 삶에서 어떤 식으로 액션을 취해야 하는지' 더 직접적으로 말해주고자, 더 알려주고자 했던 것 같다. 여기서 그가 권면하는 액션이 바로 '반항'이다. 그리고 이때의 '반항'이란 요즘 말로 '무지성', '무논리'로의 '맹목적 반대'가 아닌 삶을 그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는 '적극성'을 뜻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몇 명의 실존철학자들이 꽤 자주 언급되었다.
셰스토프는 인간 판단에는 해결책이 없고, 이를 신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부조리가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부조리를 신에게 맡기고 현실은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를 부조리의 해결을 위해 부조리를 수용하는 부조리 그 자체라고 말한다.
또, 키르케고르는 세계의 비합리와 반항적 향수 사이의 관계 자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인간은 비합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계속해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를 도리어 비합리를 신격화해버리는 부조리라고 말한다.
실존철학자들은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선택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고 하는데, 그들도 결국엔 신의 영역으로 또는 또 다른 부조리로 회피하고 말아버린다는 것이다.
≪페스트≫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등장한다. 가장 돋보이는 변화를 보여주는 건 단연 파늘루 신부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개인의 각성과 변화의 모습을 볼 때면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다니엘 콴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에올)≫, 그리고 나와 엄마의 관계가 떠오른다
나는 20대 후반에 뒤늦은 사춘기를 만났다. 바닥을 친 신뢰, 사랑하는 어른의 죽음, 거기에 엄마의 냉정한 말까지. 쓰리 콤보는 나에게 느지막이 꿈을 갈망하게 했고 범생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유를 찾아가게 했다.
당시 엄마는 자꾸만 내게 '수용하지 않음', '그대로 두지 않음'을 죄로 탓했다.
연 단위가 되도록 가족과 거리를 두었고, 혼자 자꾸만 제주도에 가서 바닷가를 오래 걸었다.
그리고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 순간이 내게 '부조리를 깨달은 시지프가 된 찰나'였을지 모른다.
나는 엄마가 내게 용서를 빌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대화가 삭제된 우리 관계에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내었다.
"너, 엄마가 용서해줄게."
충격이었다. 나를 용서한다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답변했다.
"엄마는 내 영혼을 죽이고서는 도리어 반대로 나를 용서하겠다고 하네."
그제서야 바뀌는 엄마의 얼굴. 그 개안의 표정. 강인한 엄마에게서 처음 보는 눈, 눈빛.
엄마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몰랐어."
내 한 마디에 엄마는 무언가를 번쩍 곧바로 깨달은 거다.
평생 울지 않던 엄마가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왜 나는 몰랐을까, 왜 나는 네가 잘못한 것만 떠올렸을까.
왜 나는 딸이 엄마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내가 네게 한 잘못들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내가 용서를 구해도 네가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너무 두렵다."
엄마는 순식간에 '세상에 수용하지 않는 자세'로 '순리 밖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몇 년간 쌓인 아픔이 그렇게 단 몇 분만에 무산되었다.
그 지점, 그 순간, 그 찰나부터 우리는 곧바로 몇 년 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니엘 콴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에올)≫에서처럼.
일이 끝난 후 에블린네 가족들과 베키는 재결합하여 평화로운 날을 맞이하고, 다시 세무 조사를 받으러 간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희망은 고통을 상쇄하지 않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페스트≫에서는 그럼에도 영원한 승리와 결정적인 개선은 없다고 다시 한번 말한다.
하지만 부조리를 인지했다면, 떨어지는 바위를 똑바로 주시한 후 또다시 천천히 고통을 준비할 수 있다.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페스트≫는 5년 전 이제 막 다시 독서에 불을 지피던 때 이제 고전을 읽자고 다짐하며 ≪데미안≫, ≪동물농장≫, ≪1984≫에 이어 네 번째로 손에 쥔 책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독서에 취미는 있었지만, 그 처음은 '베스트셀러 소설' 또는 시드니 셀던의 추리물이었고, 그다음은 한창 입시를 준비하던 열여덟, 짝꿍 때문에 알게 되어 매일매일 밤을 새워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물이었기 때문에, 아주 근본적인 고전부터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저렇게 나열된 고전의 제목을 보니, 그 내용이 머리에 비친다. 네 가지 고전 모두 형형색색의 메타포가 살아 있다. 고전의 맛은 은유에 있다고 본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내가 늘상 읽던 유희의 대상, 추리물들을 감상하는 것마냥 글을 글로만 보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나 도서 뒤에 함께 담긴 역자 해설 또는 평론가의 평가는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느낀 은유에 만족했다. 내 삶에 빗대어 보고 나를 돌아봄에 쾌락까지 느꼈다.
당시에는 조금 어려운 말로 번역되어 있는 글을 한땀 한땀 끊어가며 읽는 것도 그 자체로 좋았는데, 지난 5년 간 고전을 주로 읽으며 독서 생활을 하고 보니, 현대인에게 조금 더 쉬운 번역이 있는가 하면 역자가 주관적으로 맛깔나게 의역한 것도 있고 원문 그대로 쉼표 하나까지 살리는 번역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움 출판사 ≪페스트≫의 이정서 역자는 이 책의 번역을 '카뮈의 문장을 구조 그대로 살려낸 정본 번역'이라고 말한다. '카뮈'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기에 그런 것까지 바뀌어 있는 게 보이면 다른 번역이 더 나은 건가 싶다가도,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바꾸지 않았다는 '역자의 말'을 보니 그 또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해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