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 2회독.
≪데미안≫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조국 독일을 매우 비판하여 반역자, 변절자,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리고 젊은이의 고백을 선입견 없이 전달하기에는 나이가 든 40대의 헤세가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쓴 장편 소설이다.
1917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단기간에 쓰였으며, 집필 직전인 1916년 6월에서 11월까지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인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에게 심리 분석 치료를 받으면서 내면과 무의식, 신화와 종교에 관한 새로운 관점에 눈을 떴기에 심층 심리학을 기반으로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연장선으로 챕터별로 등장하는 스승의 역할을 하는 인물(사실은 싱클레어의 내면일 수도 있는 것)을 기준으로 자기만의 감상을 구분하리라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데미안 등 구도자 역할의 인물의 존재 유무를 내면의 표현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고, 결국 작품의 전체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어 가는 것을 강하게 이끌고 유도하는 만큼 나만의 몽상적인 해석만을 내놓고 싶다.
나는 1919년 이 작품의 출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데미안≫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하나다.
코로나-19로 여러 제한이 강화되기 직전, 나는 갑자기 독서를 다시 취미 삼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그토록 읽기와 듣기와 쓰기를 사랑했다는 걸 왜 잊고 살았는지 가물가물 떠올리며 이제부터는 근본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처음 손에 쥔 작품이 ≪데미안≫이었다. 2019년 9월 25일 첫 회독을 마치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연이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을 읽고는 자기만의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내심 많은 정신, 낙타. 정신에 있어서 사자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나는 왜 무거운 짐을 견디는 짐승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체념과 외경심의 짐승으로 말이다. 새로운 자유를 얻고자 한다.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아직 낙타다운 고민, 망설임, 그리고 불안함.
생각에 잠겨가는 얼굴과 그것을 바라보는 현재.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옳거나 그르다는 건 무엇일지.
의미는 닳고 바래지는 것, 가치관도 변하고 깨어지는 것, 오래가는 것에는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지만 또,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고집쟁이 주제에 결국에는 자꾸만 바뀌는 생각 덕에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혼자 왜인지, 창피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2025년 8월. 재독을 해보니, 그때의 감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생각들로 인해 완전히 바뀐 내 삶과 하지만 어느 정도 회귀한 현재가 너무나도 새롭게 느껴진다.
나의 짧은 인생 3연타 공격은 나를 허무주의에 빠뜨렸었다. 헤세의 ≪데미안≫과 니체의 ≪차라투스타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 그걸 더 부추겼다. 새로운 연쇄작용으로 극도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갇혀 개인주의에 허망함을 느꼈다. 전혀 반대의 인생을 살아보아야만이 나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당시 고전을 처음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미안≫을 그다지 깊게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사고의 회로가 싱클레어와 완전히 동일하게 흘러갔다.
강려크한 기독교인 가정에서 완벽하게 그 사상 안 선(善)으로 키워진 나는 우리나라 특유의 유교적 기독교 마인드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원하던 기독교 대학으로의 진학은 내게 덧입혀진 향을 더 진하게 우려냈다. 강조하는 금욕주의가 내게는 어렵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하지 말라고 하는 방향으로의 욕구가 애초에 전혀 없었기 때문.
그때보다 나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된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순종적이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성실하고 착실한 모범생 타입'이다. 그리고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인 동시에 '이기는 것, 잘 해내는 것에 대한 극심한 욕구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다. 모의 태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크게 교육하지 않아도 발휘되는 나만의 개인적인 기질이 그런 것 같다. 나는 교육받은 바운더리 안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남들보다 더 잘' 모든 것을 해내고 살아내고 싶었다. 딱히 '순종적인 타입'은 아니었으나 그런 나의 기질과 욕구는 부모가 원하는 바와 같았기 때문에 순종적으로 보이게끔 했고 나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란 아이가 되었다. 싱클레어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데에서 ≪데미안≫에 더 깊게 빠졌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다시 옛날 같은 어투로 편지를 하셨다. 비난이나 위협을 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나 그 누구에게도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변화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소망과 일치했다는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는 나로 하여금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했고, 그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게 했으며, 나를 더욱 고독하게 했다.
지만지의 《데미안》 p.139
싱클레어와 다른 부분이 있다면 나는 나의 금욕적인 생활로 생겨나는 정적인 삶에 만족했었다.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음을 고독으로 여기지 않았다. 신과의 교통과 가족의 사랑이면 내가 그려온 이상이 펼쳐지리라 확신했다.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건 우물 안 세상일 뿐이었다.
전공을 바꾸자마자 성적이 아주 크게 올랐다.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이제는 학창 시절과 달리 비슷한 수준의 애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열심히 해도 잘 오르지 않는 성적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노력은 바로 성취를 가져다주었다. 곧바로 원하는 교내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감성을 나눌 관계뿐 아니라 내 앞길에 의미 있을 사이들도 굉장히 늘었다.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졸업을 하자마자 전공을 살린 전문직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처럼만 살면 남은 인생에서도 성취만 있을 거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열심을 다해 '성실하고 착실하게' 노력했고 뒤쳐질만하면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솓아올라 어떤 경지에 다다라서 결국은 이겨버렸다. 그런 삶은 남들 보기에 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하지만 인생의 3연타. 하라는 대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만 잘 살았는데 나에게 왜?
전혀 반대의 인생을 살아보아야만이 이 세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 여행을 다니게 됐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행복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대의 것들을, 내게는 금기의 것들, 암락사스, 완전한 암흑의 세계를 나는 나만의 기질을 발휘해 또다시 '성실하고 착실하게' 경험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자꾸만 깨달아졌다.
나는 나를 너무 몰랐다. 아닌 척, 겁 많고 상처를 거절하려 발버둥. 무던한 것도 '척'이었는지 나조차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자기객관화가 인생의 메인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우물에 걸터앉아서 발을 내딛지 못했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기는 더더욱 싫어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여전히 겁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무례였을지도. 내딛지는 못하고 제자리 점프, 높이 보면 다인 줄 알고 이기적이고 거만했다. 바닥의 색을 알 수 없는 수심 깊은 바다로 살고 싶어 끊임없이 물만 채웠다. 그럼에도 플라스틱 파란색이 바다의 색인 척. 내 한 몸만 간신히 잠기어지는 유치한 풀장이었다. 그리고 그 바닥엔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밟힌다. 충분히 쏟고 싶었다, 마음을.
생(生)의 방식을 바꾸고 업(業)을 완전히 다른 쪽으로 옮겼다. 읽다가 보니 글을 매만지고 싶었다. 물론, 다른 형태의 삶에서도 마주치는 힘듦이 있었다. 넓게 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알을 깨고 나오니 애정으로 읽던 글과 듣던 멜로디와 쓰던 활자와 매만지던 타인의 창작은 그 안에만 머물지 않고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니 숨통이 트였다. 순환(循環)을 사랑하게 되고 작품 사이의 얽힘, 그리고 내 하루하루 삶과의 설킴, 타인과의 엮임이 하나가 되었다.
헤세의 ≪데미안≫으로 시작된 격동적인 변화는 내 짧은 인생에서 5년 동안 지속되었고 작년 파울로 코엘료로 우선은 일단락되었다.
그는 '예감'이라는 것이 삶의 보편적인 흐름 한가운데,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들 속에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방식으로 펼쳐져 있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문학동네의 《연금술사(1988)》 p.127
두 눈빛이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곳에서 언제나 똑같은 힘으로 되살아나는 것. 사랑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표지였다. 정체도 모르는 채 오랜 세월 기다려온, 책 속에서, 양들 곁에서, 크리스털 가게와 사막의 침묵 속에서 찾아 헤매던 바로 그 표지였다.
순수한 만물의 언어였다. 우주가 무한한 시간 속으로 여행할 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거기엔 어떤 설명도 필요없었다. 산티아고가 그 순간 깨달은 것은, 운명의 여인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필요없었다.
같은 책, p.158
모래 알갱이 하나는 천지창조의 한순간이며,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온 우주가 기다려온 억겁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했다.
같은 책, p.213
코엘료의 작품으로, 내가 벗어나고자 했던 건 나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아닌 뭔가 삐딱하게 엇나가 있는 유교적 기독교인들이라는 걸 슬슬 알게 되었다. ≪다섯번째 산(1996)≫를 통해 '비극이 만들어준 기회'를 인정하게 됐다. 여인과의 결혼과 목공소의 건재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모습에서 사회에서의 종교인들의 모습이 떠올렸고, 그의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신께 반항하며 발버둥을 하는 것까지도 신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영혼적인 대면의 어린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순리대로 흘러가며 사는 어른의 태도가 부끄러울 것이다. 나의 남은 생을 반항으로 성장할 수 있길 바라게 되었다. 진정한 순환.
춤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죠. 실제 자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애쓰는 소심한 사람으로 말이죠.
문학동네의 《포르토벨로의 마녀》 p.215
당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증명하려 애쓰는 대신, 그저 웃으세요.
같은 책, p.227
이러한 개인적 깨달음과 순환에도 ≪데미안≫은 가치 있다. 에세이적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는 집어내고 싶은 두 가지를 더 나눈 후 글을 끝내려고 한다. 특히나 지만지 출판사의 ≪데미안≫만이 가지는 특별함, 이 판본을 통해 알게 된 더 깊은 앎을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데미안≫을 심층 심리학을 기반으로만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독서도 숙제처럼 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의 특이점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은데, '진정한 나'를 끌어내는 ≪데미안≫에 관한 감상을 나누려고 하면 '융'과 '심리학'부터 말하는 사람들을 벌써 꽤 보았기 때문에 허투루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작품 탄생 시기를 고려해 세계대전 시대를 함께 살피기까지는 하겠다만, 지극히 개인적 읽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데미안≫은 독자 개인의 일대기를 돌아보는 도구로만 써도 성공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지만지 출판사의 ≪데미안≫에서는 독일 본(Bonn) 대학교에서 헤르만 헤세와 로베르트 무질, 하인리히 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혜선 선생님의 해설로 바흐오펜의 모권 이론을 제시한다. 참고로, 전체 466쪽 중 267쪽부터 해설이 시작되는데, 청소년 필독서라며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을 학생 시절부터 익숙하게 접했을 것을 인지하고, 하지만 학술적인 해석과 깊이 있는 설명은 부족했으리라는 것까지 배려하여 기획한 구성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특히 모권 이론에 대한 신혜선 선생님의 설명과 작품과의 연결은 ≪데미안≫과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른 다양한 작품들까지 모두 떠오르게 했다.
헤세는 융의 심층 심리학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바흐오펜의 '모권적 위대한 어머니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초기 작품들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한다. 특히 7장과 8장에서 에바 부인과 그녀를 둘러싼 공동체 묘사와 시대적 격변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이 부분이 강하게 드러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근원에 거슬러올라가 보면 만나게 되는 동일한 어머니에 대한 인식의 공명이 있다.(신혜선 선생님의 해설 발췌 및 변형)
이러한 해설은 지만지 출판사의 판본으로 직접 전문 읽어보시길 권한다. 나는 여기서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을 떠올린다. ≪데미안≫의 에바 부인처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에바'도 구약성경의 이브(하와)에서 따왔으며 그 성질과 기능도 유사하다.
이어서 지만지 출판사 판본의 역자이신 이인웅 선생님의 해설이 이어지는데, 전일성에 관해 강조해주어 ≪데미안≫에서 느껴지는 분투 속 평화가 단일 사상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자기 자신의 독자적 힘으로 자신을 완성시키고 자기 자아에 도달하여 결국에는 우주 만유와 하나 되고자 하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사물의 상들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파악하고 순간에서 영원을 투시하고자 노력하며 마침내는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헤세의 삶과 작품을 명확하게 직시할 수 있도록 한다.(이인웅 선생님의 해설 발췌 및 변형)
≪데미안≫과 함께 이런 고뇌를 더 해야만 하는 분들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미드나잇 가스펠(2020)≫을 추천해본다. 진정한 LCL를 느낄 수 있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