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박지영 작가님의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를 읽어 내려가자니, 자꾸만 이야기가 납작하게 가라앉는 영상이 재생됐다. 어떤 이야기들은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간다. 그 안의 글자들이 지면에 바짝 판판해진다. 하지만 그 속의 캐릭터들이 살아 있다면 픽션은 진짜로 설득이 되고 배경과 상황은 종이 바깥으로 3D로 튀어 오른다. 마치 신파라며 은근 돌려 까이면서도 천만 관객을 돌파해내는, 남녀노소의 비밀스런 동감을 얻는 그런 한국 코미디 영화 같았다. 사랑에 대한 부정은 현실적인 부담이 기본적으로 피어오르는 감사와 사랑을 억누르고 외면하도록, 다정한 사람이면서 아닌 척하게끔 했다.
박지영 작가님의 또 다른 작품, 이번에는 단편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에서도 '아닌 척'하는 화자이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승혜는 남들의 욕망과 선택을 기준 삼아 남들의 시선과 생각에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성격에 아주 질려버렸다고 그래서 놓아버렸다고 꽤나 충분히 믿고 있는 중년의 인간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있다. 그저 아닌 척, 의식적으로 그리고 또 무의식적으로 "그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예치해둘 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게 정말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가 자꾸만 남들의 시선과 생각을 되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전지적 작가시점이건만 왜 이리도 승혜 자신의 머릿속 생각인 것만 같은지. 무언가 중언부언.
그건 매우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으로 보였다. 그 결정을 따르지 않는 생산성 없는 하위 계층의 노인들은 이기적이고 사회를 노후화시키는 암적 존재라는 지탄을 피할 수 없었다.
위즈덤하우스의《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p.17
그러니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전환을 선택하지 않고 늙고 병드는 노인들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같은 책, p.29
가난하고 아픈 장수 노인의 불행한 삶과 대비되는 풍요롭고 건강한 장년의 삶과,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한가로운 전환 이후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이 사회를 한층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 새로운 보편이고 중론이었다. 승혜 역시 그 말에 공감했다.
같은 책, p.39
영화 ≪인셉션≫이 떠오를 듯한 배경에 놓인 '나이 듦'과 '우정'.
일본 소설 ≪내일의 기억≫과는 대치되는 '인상'이 향하는 위치.
작품 자체로는 객관적으로 그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둥실둥실 부유하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취향을 쌓지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카테고리의 인간으로 분류했던 것 같다.
한때는 그 싫어하는 수준이 혐오에 가까웠고 특히나 평범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럴 때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라는 강요가 싫었다.
상대가 누구든 '네가 뭔데?' 하는 반발.
이 이야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쿡쿡 찌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 혼자서 그 지점에서 부끄러움을 또륵 흘렸다.
평범과 평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만의 자유를 희한하게 또는 비방하며 바라보듯이
나 또한 그들을 같은 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 강선동이 운영하는 '기억 예치소'에서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에 나에 대한 불쾌감을 꾹꾹 눌러 담았을지 모른다. 나 또한 내 속에 만들어둔 주판으로 상대와 나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계산하며 정확하게 되갚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나를 되돌아보고 나니 이유 없는 친절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나의 인애를 놓치지 않는 사람.
그래, 인애에게, 라고 시작하는 편지글을 쓸 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치고 나서야 왜 자갈이 되고 싶었는지가 떠올랐다.
(중략)
왜 이렇게 다 예쁘지. 주운 돌들을 해변의 모래 위에 늘어놓고는 하나를 선택하기 힘들다며 승혜가 투덜댔다. 그런 승혜를 보며 인애가 후후 웃었다. 왜? 물었더니 예뻐서, 라고 대답했다. 그치? 다 예쁘지? 했더니 인애가 또 웃었다. 응, 다 너무 예뻐.
같은 책, p.61
승혜는 가지 않았다. 결혼식이 1시인데 오전 10시부터 결혼식 직전까지, 인애에게서 계속 메시지가 왔다. 널 다시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누구보다 네 축복을 받고 싶었어. 꼭 와줄 거지? 꼭 와. 기다릴게. 승혜야. 온다고 약속했잖아. 기다리고 있어. 승혜야. 나는. 어째서 너는. 너는 또 나를. 왜. 그렇게.
같은 책, p.86
승혜는 기다렸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그러나 여자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언가 남기고 싶은 글이 있어 이렇게 깨끗하게 단장해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승혜는 두 번의 생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특히 바라는 것 없이 위해주고 내주는 마음에 대해서는 영영 알 수 없을 거였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승혜는 날마다 봄빛을 닮아 짙어지는 푸른 바다를 보았다.
같은 책, p.88
사실 나는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가 지난 8월 완독한 신간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작가님의 단편인 줄을 몰랐다. 그래서 어떠한 부수적인 오해나 편견 없이 내 앞에 놓인 새책에 가닿을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박지영 작가님의 이야기는 하나 같이 납작하게 가라앉아 바닥에 들러붙어 버린다. 그리고 독자가 '나'라는 매개체를 그 앞에 들이댈 때 풍경과 캐릭터들이 정말로 살아 있는 듯이 3D로 튀어 오른다. 증강현실처럼 말이다!
같은 작가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돌봄'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성질'에 다정하게 집중하는 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또한 편견 없는 독서로부터 기인될 수 있었던 사고라고 본다. 독자들에게 완벽하게 딱 붙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은, 알고 보니 작가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야기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늘 들고 다니던 노트북이 든 숄더백 때문에 오른쪽 어깨가 고장 나더니, 그래서 크로스백을 메고 다녔더니 이번엔 왼쪽 어깨가 고장이 났다. 오십견이란 말이 붙은 질환은 정말 딱 만 50세의 나이에 겪는다는 게 신기하고 심통도 났다.
같은 책 <작가의 말> p.96
글을 안 쓰거나 못 쓰던 시절에, 타자기가 있으면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같은 책 <박지영 작가 인터뷰>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