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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less Oct 26. 2024

다섯, 개인주의자 선언

외할머니와 무조건 함께 가야겠다 생각했다.


사실 며칠 전 엄마에게 휴식 기간 동안 둘이서 타이베이에 가자고 운을 띄웠다. 엄마는 1초 만에 싫다고 했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진짜 쉬는 건 집에서 쉬는 거라며 나보고 그만 놀고 공부를 하라며 잔소리를 시작하려고 해 나는 방으로 숨어버렸다. 이런 반응은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이렇게 단호할 줄 몰랐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면 되는 것이다.


여행동행자로 가족모두에게 버림받은 나는 엄마를 움직이는데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가 제일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결혼식 일도 있으니 할머니도 함께 해외로 가버리는 거였다. 그러면 엄마도 충분히 납득하리라 나 혼자 생각했다.


그러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직까지 청춘인 엄마와 단둘이라면 몰라도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간다는 건 준비할게 배로 많아진다는 이야기이니까. 지금이라도 사촌언니에게 얼른 일정을 공유하고 같이 날짜를 잡아볼까? 라며 잠시 사라졌던 회색 인간의 마음이 자꾸만 꿈틀거린다. 상황을 고려하며 어른스럽게 생각할수록 언니에게 기대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리고 이 여행은 자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이 없었다. 마침 올해 할머니는 80을 맞이했고, 엄마의 휴가 선언에 이모, 외삼촌들까지 할머니의 자식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고민하고 있는 시기였다. 내가 여행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대대가족 여행이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대대가족 여행이 된다면 나는 이 여행을 엎어버리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이 뻗어나갔다.


왜냐? 그건 당연하다. 내가 제안했으니 내가 책임자가 되기 때문이다. 마침 이 많은 가정들 중 놀고 있는 백수는 유일하게 단 한 명이었다. 바로 나. 그럼 모든 일정과 계획은 당연히 내 몫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 백번 양보해 운명을 받아들이고 일정과 계획을 세운다고 하자. 그러면 엄마의 눈 수술일정이 꼬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두의 휴가기간과 일정을 조율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여행일정이 조율되고 나면 모두의 기호를 충족하는 여행을 위해서는 일정을 다각도로 짜야한다. 적절하게 단체일정과 개인일정을 분리해야 하고, 숙소와 이동수단 또한 다산가정의 축복으로 14명이나 되는 인원이 편리하게 움직일 방도를 찾아야 했다. 편두통이 일어났다.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나는 잃어버렸던 약간의 용기만 되살아 났을 뿐, 책임을 던지는 건 자신 있어도 모든 걸 책임질 만큼의 책임감은 아직 살아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문제를 조율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엄마의 수술기간에 맞추어 한 달 안으로 해내기엔 아무리 백수라도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기 위해 개인주의자가 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바로 이 여행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조용히 진행해 보자 결심한 것이다.


나는 핑계를 가진 어른으로 자랐으니 핑계를 한번 더 이용해 본다. 개인주의자는 나쁜 게 아니고 나는 개인주의자적인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다고. 이 모든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하필이면 이 다산 가족이 전부다 효녀 효자들만 있는 바람에 모두가 따라간다 할 게 뻔하기에 그냥 몰래 셋만 가는 거라고.

결국, 내가 개인주의자가 되게 한 건 내 능력과 한계 때문이 아니라 우애 좋고 사이좋은 가족관계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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