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 2가 개봉했다. 우리는 다시 1편을 보고, 오늘 아침 IMAX에서 3D로 영화를 관람했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전편이 너무 훌륭했기에 적당한 기대를 품고 상영관에 들어섰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다시 한번 ‘혐오’라는 감정이 얼마나 무지에서 쉽게 탄생하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특히 2편에서는 뱀이 주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광고에서도, 포스터에서도 뱀은 은근슬쩍 ‘빌런’처럼 사용되었다. “뱀처럼 간사하다”라는 오래된 속담처럼, 우리는 설명도 필요 없이 뱀을 경계한다. 토끼나 여우보다 덜 사랑받고, 이유 없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뱀은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였다. 편견은 어떤 동물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이유 없이 들러붙을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티 없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속 이야기조차 이토록 많은 차별과 오해의 구조를 품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살면서 너무 많은 순간 ‘뱀’처럼 취급된 적이 있다.
게이라는 이유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even in Australia, even almost 20 years
나는 설명 없이 불편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그냥 나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편견 속에서 이미 역할이 정해져 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나는 차별 안 해요.”
하지만 차별은 큰 행동이 아니라, 눈빛, 침묵, 미묘한 거리감, 가볍게 던진 농담 속에서 훨씬 더 깊게 새겨진다.
뱀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한다. “그냥 싫어.”
그냥.
설명 없이.
이유 없이.
나는 그런 ‘그냥’에 너무 자주 갇혀 있었다.
영화 속 뱀들은 많은 장면에서 조용했다. 해명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오해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끝까지 피해자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약자는 종종 말할 수 없어서 약자가 아니라, 말해도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약자인 것이다.
조용한 피해자. 설명할 시간이 없는 피해자. 상대가 이미 마음속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말해도 바뀌지 않는 피해자. 이건 비단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겪었던 일이고, 지금도 세상의 많은 ‘뱀들’이 매일 경험하는 일이다.
행복이를 키우면서 나는 더욱 강하게 느낌을 받는다 아이들은 누구든 약자가 될 수 있고,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이든 편견 속에서 굳어지지 않도록 부모가 끊임없이 지켜보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나는 행복이가 누군가를 단순히 생김새로, 실력으로, 배경으로 판단하지 않는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뱀처럼 취급’ 받는 상황에 놓였을 때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세상은 약자를 얕보고, 다름을 두려워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미워하는 방식으로 너무 쉽게 흘러간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만큼은 그 오래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주토피아 2는 나에게 깊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얼마나 많은 ‘뱀’을 미워하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스스로가 ‘뱀’이 되어 있었는가?
혐오는 무지에서 시작되고, 무지는 경험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자란다.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나는 조용히 마음속에 다짐했다.
모르고 싫어하지 않기.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 판단하지 않기.
다른 존재의 조용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주토피아 2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거울 같은 이야기였다.
우리 안의 편견을 비추고, 그 편견이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상처 주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그래서 나는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이렇게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