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세상 제일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는데 문득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벌떡 일어나 거실에 있는 책장에서 그녀의 시집을 찾는다. 빼곡한 책들 사이에서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그녀의 시가 궁금해져 구입했지만 정작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는 시집 중의 한 권이다. 아마도 몇 편 읽다가 어렵다는 느낌 때문에 손을 놓았으리라. 먼저 시 제목을 떠올리며 목차를 눈으로 훑는다. 78쪽에서 함초롬히 누워있던 그 시를 만났다.
2월 초입, 17살 때부터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그녀들과 완전체로 만났다. 한식부터 오리수육까지 식당 서너 곳 중에서 보리굴비가 일품이라는 그곳에서 합류.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나섰다. 행선지는 식당 인근에 있는 산이다. 애초에 등산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바람을 맞으며 눈이 쌓인 데크를 따라 걷기로 한다. 인기가 많은 등산명소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식당과 카페가 즐비해 간판을 읽으며 걷는 즐거움이 있다.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든든한 식사 덕분에 걸을만하다. 제철을 맞은 딸기를 파는 상인들의 손길이 딸기빛깔처럼 붉어 저절로 눈길이 멎는다. 하얗게 눈이 쌓인 산을 배경으로 모처럼 인증숏도 남기고 일상을 주고받는 여유로운 시간이다.
볼이 얼얼해질 무렵 근처 카페로 이동해서 자리를 잡았다. 3층 전체가 카페인데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하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인 수다를 나눈다. 오늘 주제는 퇴직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공직에 있는 친구 남편은 불안정한 아이들의 진로 탓에 뒷바라지를 위해 제2의 직업으로 개인택시 운전할 준비를 하고 있고, 또 다른 친구는 정년보다 미리 명퇴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대화 도중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는 친구가 갑자기 시낭송에 대해 묻는다. 수업 시간이나 인사말을 할 때 시를 애용한다며 휴대폰에서 시 한 편을 찾더니 읽어 달라는 것.
그녀가 요즘 사랑하는 시는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문학애호가뿐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한강작가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는 바로 < 괜찮아>였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듣고 싶었던 말은 '왜 그래'가 아니고 '괜찮아'라는 말이라는 내용을 담은 제법 긴 시이다. 그 시를 읽을 무렵 그녀는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단다. 마음에 와닿아서 제자들에게 읽어주었는데 눈물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개그맨처럼 읽으며 슬픈 웃음으로 서둘러 마무리했을 것이다.
오늘은 출근길에 어젯밤에 찾아둔 한강 작가의 시집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녀의 시들을 필사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제일 먼저 친구의 애송시 <괜찮아>를 읽으며 작가의 마음을 떠올린다. 나 또한 자신은 물론 누군가에게 괜찮냐고 묻는 대신 '왜 그래'라고 묻는 날이 많았음을 떠올리며 가만히 읊조려보는 아침이다.
(중략)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