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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해방기

by 정은숙


주말 포함 일주일이 넘는 기나긴 추석연휴가 시작됐다. 첫 이틀은 평소처럼 사무실에, 사흘째 되는 날은 병원에 입원 중인 시어머니에게 온 가족이 함께 다녀왔다. 종갓집으로 시집오면서 30여 년 넘게 매년 똑같은 명절이 반복됐다. 다양하게 많은 음식을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명절 전날, 남편과 장을 본 후 가족들을 위해 대량의 돼지갈비를 재우고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나물을 무치고, 산적을 지지고 찜기에 조기를 찌고. 명절 당일날 아침, 한 시간 넘게 차례상을 차리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반나절이 지났다. 올해 명절은 조금 아니 많이 달라졌다. 고관절 수술을 받은 시어머니의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은 이번 명절은 과감하게 집안에서 지내던 차례를 생략하고 납골당에서 간소하게 성묘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예전처럼 인파로 북적한 마트를 찾아 차례에 필요한 약과와 명태포, 산적거리 등도 구입하지 않았다.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전통시장에서 맛깔스럽게 무친 홍어회 1kg과 가족들이 좋아하는 개피떡과 꿀떡, 송편 각 한팩을 구입하는 것으로 명절 준비를 끝났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엄마는 동태 전, 동그랑땡과 갖가지 야채를 넣어 부친 야채 전을 챙겨주셨다.


추석 명절 당일 아침, 오전 10시경 납골당을 들렀다 아빠에게 성묘 가기로 했던 당초 계획은 추적대며 내리는 가을비 덕분에 급변경되었다. 남편과 아들이 대표로 납골당에 다녀오기로 하고 집을 나선 후,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례를 모신 남동생은 처갓집을 가기 위해 서울로 떠났을 시각, 비가 와서 성묘가 어려우니 우리 식구가 친정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대신 엄마와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이른 아침부터 차례를 지낸 후 집안 정리를 하고 있던 엄마는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셨고 그때부터 나는 점심식사 준비로 분주해졌다. 미리 홈쇼핑에 주문해 둔 LA갈비를 냉동실에서 꺼내 인덕션에 올리고 지인에게 선물 받은 제주산 갈치 두팩도 꺼내 해동했다.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줄 향긋한 냉잇국도 메뉴로 추가했다. 이른 봄 남편이 시골 들녘에서 직접 뜯고 다듬어 데쳐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냉이로 구수한 된장국을 끓이기로 한 것이다. 냉장고에 있던 브로콜리와 파프리카가 식탁에 올라왔고 오이와 상추도 바로 무쳐냈다. 적당하게 익은 총각김치와 엄마표 물김치, 미리 사다 둔 전통시장표 홍어회와 가리비 젓갈까지. 금세 식탁이 풍성해진다.


성묘를 마친 남편과 아들, 엄마와 여동생이 오전 12시가 지나 차례로 집에 도착한다. 누릇하게 튀겨진 갈치구이, 달달한 양념이 잘 배인 LA갈비와 구수한 된장국을 세팅하고 갓 지은 밥까지 올리고 나니 식사 준비 완료. 엄마가 추가로 챙겨 오신 삼색나물과 미역무침까지. 제법 푸짐한 명절 한상을 받은 엄마와 가족들의 젓가락질이 분주해진다. 남편은 연이어 갈치 살을 발라 내 밥에 얹어주고 나는 그 하얀 갈치살을 엄마 밥으로 옮긴다. 달큼한 갈비와 상추 겉절이를 맛있게 드시던 엄마가 '우리 딸이 음식도 잘한다'며 흡족해하신다. 살림에는 관심 없이 늘 바쁜 탓에 손자 손녀가 내 음식 솜씨에 대해 언급해도 설마 하셨었나 보다. 엄마의 특급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나도 아주 잘은 아니지만 스피드는 자신 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엄마 음식솜씨를 물려받았노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갈치구이와 갈비그릇이 비어갈 무렵, 연신 배부르다는 말을 하던 가족들이 하나 둘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다음 코스는 빼놓을 수 없는 후식타임. 잘 익은 캠벨 포도와 케이크 한 조각에 딸이 직접 내려 준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이어간다. TV에서는 트롯가수가 진행하는 노래자랑 프로그램에서 흥겨운 노래가 이어지고 어스름한 창밖에는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는 추석 명절. 평소 같았으면 나는 명절 음식을 준비해 차례를 지낸 후 엄마를 모시고 아빠 산소에 갔을 시각. 며칠 동안 명절을 쇠러 오는 자식들을 위해 김치를 담그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볶느라 내내 주방을 벗어나지 못한 엄마와 여동생도 비와 달라진 우리 집 명절 분위기 덕분에 모처럼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어 느긋한 명절 한때를 보낸다. 작년부터는 매년 당연하게 엄마표 밥을 먹던 명절 패턴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명절 한 끼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명절이면 내내 자식들을 위한 밥상 준비에 애쓰던 엄마에게 작은 쉼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식사 후 소파에서 얼마 전 수술받은 무릎에 온찜질을 하던 엄마가 집에 가신다며 슬슬 일어나신다. 모처럼 식사 준비에 딸이 피곤할 것을 염려해 내린 배려일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 전화를 게을리해도, 늘 못한 것보다 잘한 일 한두 가지를 대단한 일로 여기는 영원한 응원군. 밥도 잘 안 해 먹는 딸 집 냉장고에 마늘은 있는지, 깨소금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항상 챙겨주시는 엄마. 매번 줄 것이 있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궁금해하는 사랑꾼 엄마. 명절이면 자식들에게 맛있는 음식 한 가지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손에 물이 마를 겨를이 없던 시간들이 떠올라 괜스레 미안해지는 시간. 오늘을 계기로 앞으로도 명절에는 연로한 엄마대신 오늘처럼 내가 음식을 준비해 엄마에게 작은 휴식을 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어느새 주름 가득해진 엄마의 얼굴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여전히 기나긴 연휴 동안 큼지막한 캐리어를 들고 멀리 해외여행을 떠나는 행렬에 끼지는 못했지만 종갓집 며느리인 나는 30년 만에 남편의 결정 덕분에 명절 차례에서 해방되는 기분을 맛보았고 엄마와 여동생에게도 잠시나마 쉼을 선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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