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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민 Nov 23. 2024

뜻밖에 상담

눈치는 보지만 눈치는 없다.

"실습일지 작성 끝난 분들은 제출하고 가시면 됩니다."


하루의 마무리는 실습일지를 작성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루 중 실습일지를 작성할 때가 가장 즐겁다.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추후 보완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한 내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실습일지에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온 신경이 선배에게 쏠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만족스럽지 못한 실습일지를 제출하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혜정아, 안 가?"

"할 게 좀 있어서."


회의실을 나가려던 현정이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딱히 할 건 없었지만 후원물품을 옮기러 간 선배를 기다려야 했다. 현정이 나가고 십여분쯤 지났을까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땀에 젖은 선배가 들어왔다.


"어? 있었네?"

"... 시간 좀 내달라고 하셔서."


미적지근한 선배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시간 좀 내달라고 한 게 오늘이 아니었나? 실습을 다 마치고였나? 혼자 설레발친 건가? 그런 거라면 너무 창피한데 어떡하지? 두근두근, 속이 울렁이면서 기분 나쁜 심장박동이 고막을 울려댔다.


"갔을 줄 알았거든.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이 시간이네. 미안."


놀랐다. 여차하면 도망치려고 꽉 쥐었던 가방을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선배는 자신의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더니 머리와 목뒤를 닦았다.


"혹시 괜찮으면 1층에서 기다릴래? 땀을 좀 흘려서 옷 좀 갈아입게."

"네."


또 옷을 갈아입는다고? 대체 옷을 몇 개나 들고 다니시는 걸까.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워터파크 갈 때와는 다른 옷이었다. 선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을 나왔다. 그러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땀에 젖어 진해진 남색 티셔츠와 검은색 반바지, 얼룩덜룩한 스니커즈,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핏기 없이 허연 입술. 평소에는 신경 쓰이지 않던 부분이 갑작스레 크게 보였다.


"지금이라도 갈아입고 와야 하나?"


그러기에는 선배가 언제 나올지 몰라 되는대로 입술에 붉은 빛깔의 립밤을 발랐다. 입술에 색이라도 있으면 덜 못생겨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산에 둘러싸인 곳이라 여름이라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옷도 펄럭여보고 머리카락도 바람에 내맡겼다. 선배와 단 둘의 만남이라 긴장이 된 건지 두피가 뜨끈해진 느낌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복도에서 뜀박질 소리가 나더니 곧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가방 줄을 꽉 쥐며 고개를 저었다. 시야 안으로 선배가 들어왔을 때 흠칫 놀랐다. 십오 분 남짓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손이 얼마나 빠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 세팅이 된 걸까. 그것도 여자들이 환장한다는 적당히 열린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은은히 풍기는 향수까지.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니요."

"어...."

"왜, 왜요?"


선배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춰있었다. 내 얼굴 쪽이긴 한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를 보는 건지...


"화장했어?"

"아니요?"


아! 입술을 보는 거였구나! 난 민망함에 입술을 살짝 물었다. 화장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색이 있는 립밤을 사용하긴 했다. 선배는 잠시 차에 다녀온다며 뛰어갔고, 난 뒤돌아 입술을 문질렀다. 어떻게 알았을까, 색이 그렇게 진한 립밤도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자기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한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맞으면서. 창피해서 이대로 확 도망가고 싶었다.


"뭐 해?"


선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입술을 문대던 손을 뒤로 휙 감추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선배의 향이 진하게 풍겨와 이런 거리에 면역이 없는 심장이 번지점프하듯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음, 좀 이르긴 하지만 살짝 출출한데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 먹을래?"

"저녁이요?"

"응. 여기 산다고 했잖아. 괜찮은 곳 있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걸까? 이 근처에는 식당은 고사하고 그 흔한 편의점도 하나 없다. 식당은 여기서 차로 조금 나가야 그나마 한두 곳 있었다.


"아니면 차 타고 시내로 나가서..."

"아니요! 그 조금 걸어도 괜찮으시면 저 밑에 작은 매점 하나 있거든요? 컵라면에 소시지 어떠세요?"


도로를 따라 이십 분 정도 걷다 보면 현지인들만 아는 바닷길이 나온다. 그 바닷길 끝에는 이런 곳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석진 곳에서 컵라면이나 커피, 주전부리를 파는 트럭이 하나 세워져 있다.


"컵라면?"

"네! 혹시, 안 좋아하세요?"


퍽 당황한 눈치였다. 하긴, 스테이크를 썰어야 하는 저 복장으로 개발되지 않은 바닷가에서 컵라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난감한 제안이긴 했다. 그래도, 잘 모르는 누군가의 차를 타고 잘 모르는 장소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불안하게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나는 가방끈을 손톱 끝으로 살살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아냐, 좋아해. 그럼 안내 좀 해줄래? 난 여기 잘 몰라서."

"네! 물론이죠!"


신이 난 나는 앞장서서 걸었다. 사실 그 바닷가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관리되지 않은 바닷가였지만 울퉁불퉁한 작은 절벽에서 엉덩이 깔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낭만을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런 장소를 선배와 함께 가다니, 꿈만 같았다.


다행히 이른 시간임에도 트럭은 운영하고 있었다. 난 트럭 앞으로 뛰어가 컵라면 두 개와 소시지, 과자 한 봉지를 를 손에 쥐고 계산을 했다. 한발 늦게 도착한 선배가 서둘러 카드를 꺼냈지만, 거품 없이 물품의 원가만 받는 이곳에는 암묵적으로 정해진 룰이 있다. 바로 현금계산.


"아저씨 박스 있어요? 하나, 아니 두 개 만 주 세요."


아저씨는 컵라면 박스를 두 개 꺼내주시며 나와 선배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곳에 누군가와 함께 온 적은 처음이라 내심 쑥스러웠다. 컵라면을 뜯고 물을 받아 선배에게 건넸다. 난 소시지와 과자, 박스를 들고 선배에게 따라오라 눈짓했다. 선선한 바닷바람에 잔잔한 파도, 어느덧 노랗게 물들고 있는 하늘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선배, 여기 앉으세요. 여기가 그나마 평평해요."


작은 절벽 위는 파도가 세게 쳐도 물이 튀지 않고 사람이 지나다녀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훤해 바다도 잘 보이고 뉘엿뉘엿 지는 해도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울퉁불퉁하고 깨진 바윗돌들을 조심조심 밟아가며 올라오는 게 조금은 힘들 뿐이었다.


"선배, 드세요. 아마 알맞게 익었을 거예요."


트럭에서 물을 붓고 이곳까지 올라오는 시간이 대략 5분쯤 되니까, 딱 적당히 익었을 시간이다. 난 젓가락을 까 선배의 라면 위에 올리고 소시지를 뜯어 반으로 갈랐다.


"익숙해 보인다."

"사실 제 아지트예요."

"여기가?"

"네. 혼자 사색하기도 좋고 경치도 좋잖아요."


선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선배의 눈치를 살짝 보며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대로 된 물놀이는 아니었지만 물놀이 후에 먹는 컵라면은 흠뻑 젖은 영혼에 생기를 북돋아주는 것과 같은 힘을 지녔다. 대충 배를 채우고 나서야 제대로 선배가 보였다.


"그, 음, 옷 감사합니다."

"응. 잘 썼으면 다행이야."


선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건 필히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놀리시는 거죠?"

"아마도?"


역시. 놀리는 거였어. 선배는 나를 한번 보더니 살짝 고개를 돌려 키득거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내 아지트에 선배와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다 잇새로 약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행히 선배는 못 들은 건지 선배의 눈이 점점 넓게 퍼지고 있는 노을을 향해있었다. 그리고 내 눈은 노을에 반사되어 예쁘게 물들고 있는 선배에게로 고정됐다. 불가항력이었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해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함이었다. 그때, 선배의 입이 작게 열렸다.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궁금한 거? 궁금한 거라. 어디까지 궁금해도 되는 걸까. 향수 뭐 쓰는지 물어볼까? 옷은 몇 벌이나 챙겨 다니는지 물어볼까? 피부의 비결? 집 앞에 나가실 때도 풀세팅을 하시는지 물어볼까? 사실 제일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이 과를 선택하신 이유가 뭐예요? 졸업하고 뭐 하실 거예요?"


선배 같은 사람이 배우나 방송 쪽을 꿈꾸지 않고 왜 이 학과를 택했을까. 아무 조건 없이 선의와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아니 베풀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 학과를 말이다.


내 질문이 의아했는지 눈동자를 한 바퀴 크게 굴리더니 눈썹을 긁었다.


"진로, 상담하자는 거야?"


진로상담까진 아니지만 궁금하긴 했다. 선배 같은 사람이 이 학과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서 내 생각도 달라질 것 같았다.


"전 앞으로 뭐 할지 모르겠어요. 대학 졸업만 하자라는 생각으로 버텼는데, 잘 모르겠어요."


사실 이 질문을 해도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일뿐더러 서로 대화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한 사이인데 말이다. 그냥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두자. 원래 노을 지는 바닷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니까.


"내가 너 안다고 했던 거 기억해?"

"네."

"신입생 OT때 너 처음 봤어."


신입생 오티라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접을 떨었을 때였다. 장기자랑 시간에 동기 몇몇과 팀을 꾸려 춤을 췄는데 중간에 안무를 잊어버려 막춤을 췄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막춤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한동안 '댄싱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때는 다가오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았는데 원래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알고서는 재미없다고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그러다 결국 댄싱퀸이라는 별명도 놀림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본 게 식당에서였나, 혼자 앉아먹더라고. 분명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던데 혼자 먹어서 의아했어."


아마 대학 3년 초쯤일 거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밝고 솔직하고 재미있는 친구들이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그러다 복학생 언니가 함께하게 되면서 난 그 무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는 친절의 가면을 쓰고 뒤에서는 친구들의 험담을 하는 그 언니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그 언니와 어울리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 언니와 함께하면 별 노력 없이도 조별과제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사람이 무서워졌다. 누군가를 믿는 것도 두려웠다. 앞에서는 날 이해하는척하지만 뒤에서는 어떤 말로 날 정의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다니기로 했었다. 내가 모두를 따돌렸다.


"좀 궁금해지더라. 그렇게 친구들이 많던 네가 왜 하루아침에 혼자 다니게 됐는지. 그래서 물어봤어. 누구한테 물었는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고."

"모르면 간첩이게요."

"하하, 그렇지. 그런데 내가 본 넌, 걔가 말하는 너하곤 좀 다른 거 같았어. 뭐랄까, 뚝심이라고 해야 하나, 소신이라고 해야 하나. 휘둘리지 않고 네 길을 가는 게 멋있어 보였어."


의외의 말이었다. 흔히들 고집이라고 말했다.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소신이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핑계 같은 거라고 말이다. 난 그 말을 듣고도 코웃음을 쳤다.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인맥을 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게 과연 진실된 삶일까? 난 그저 진실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난 그렇지 못했거든. 늘 타인의 평가와 기대 속에 살았어. 신지훈은 이래야지 저래야지. 그 기대를 깨는 게 두려웠어. 이 학과를 선택한 이유? 그냥 나를 알고 싶었던 거 같아.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잖아."


선배의 말을 듣고 보니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기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그러다 욕을 먹고 왕따를 당하긴 했지만 그 모든 시간이 날 더욱 굳건히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기대에 부흥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힘 빠지는 소리겠지만, 난 졸업하면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 이 학과랑 전혀 상관없는."

"엔터테인먼트 뭐, 그런 거예요?"

"뭐? 아하하하! 아쉽지만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물류회사야."


힘이 빠지긴 했다. 선배는 나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구나. 이미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구나. 그래도 아쉽긴 하다. 브라운관이나 TV에서 볼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저 사람이 우리 학교 선배다, 나랑 대화도 하고 밥도 먹었다, 이렇게 자랑도 할 수 있고 말이다.


"정말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다른 거요? 흠, 글쎄요."

"그럼, 내가 물어봐도 돼?"

"뭔데요?"


선배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뜸을 들였다. 그러다 시선을 내렸다가 올리며 말했다.


"나 어떻게 생각해?"

"네? 뭘요?"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뇌회로가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뭘 어떻게 생각하냐니, 평가를 해달라는 건가? 아까까지 그런 거 싫다고 하지 않았나? 아! 나한테 멋있다고 했으니까 자기도 칭찬받고 싶다는 건가? 자존감 회복이 필요한 거구나!


"선배도 멋있어요. 일도 열심히 하시고 책임감도 강하시고, 저 같은 후배도 잘 챙겨주시고! 배울 점이 많은 선배죠. 최고!"

".... 하."


선배의 자존감을 추켜세우기 위해 내 엄지손가락도 추켜세웠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선배는 미간을 긁으며 숨을 짧게 짧게 끊어 쉬었다. 원하는 답이 이게 아니었나? 그럼 뭐라 해드려야 하지?


무슨 말을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선배는 갑작스럽게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를 크게 매만지며 말했다.


"이 복지관으로 실습 신청한 게 올해 내가 한 선택 중에 제일 잘한 것 같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였고 상기 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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