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색무취 Aug 01. 2024

15년만에 만난 친구들

    이번 여름에 잠시 시간을 내어 한국에 다녀왔다. 지난 몇 년간 다녀올 일들은 제법 있었지만 아이들이 많이 어렸고 회사일 때문에 길게 휴가를 내기도 어려워, 한국에서 했던 일들은 그저 부모님 및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하고 다시 아쉬워하며 돌아가는 것 정도의 단순한 일이었다.


    다행히 이번 여름에는 4주 이상의 휴가 아닌 휴가를 낼 수 있게 되어 오래도록 다녀올 수 있었다. 지금 하는 회사 일이 재택 근무가 가능한 업인데다, 학교 수업 또한 온라인으로 할 수 있어서 할 일만 해낸다면 문제없이 긴 기간동안 자리를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예전 유학 초기 거의 10년만에 한국에 처음 돌아왔던 때 만큼의 설레임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는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참 좋다. 어느덧 삶의 터전도, 국적도,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공간도 다른 곳으로 바뀌었지만 마음 한 곳에선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15년 전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국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하늘 색깔도, 사람들의 모습도, 길게 늘어선 고충 아파트들의 모습도 내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LA 한인타운의 모습에서 예전 기억 속 한국을 추억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한국에 도착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마음 한 구석에서 언제나 나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 놓을 수 있다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양인들 말을 신경쓸 필요도, 가식적인 미소를 띄우며 쿨한 사람인 척 할 필요도 없으니 참으로 속 시원하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아버지가 많이 연로해 지셨다. 기운이 예전같지가 않아 밖에 잘 나가지 않으려 하신다. 같이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힘들 것 같다. 그나마 동네 뒷산은 직접 배낭을 메시고 따라와 주시니 다행이다. 다음번 한국에 왔을 때에도 같이 이렇게 산에 오를 수 있을까. 한 가지 바램이 더 늘었다.


    어머니의 밥은 언제나 맛있다. 객지 생활을 하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랐음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에겐 죄송하지만 외식을 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한 끼라도 더 집밥을 먹어야 행복해질 것 같다. 길거리의 음식도, 배달시켜 먹는 음식도 이젠 조금 먹기에 부담스럽다. 담백한 맛이 좋다.


    지난 15년간 연락이 이어졌던 친구에게 한 번 얼굴 보자고 했다. 조심스럽다. 이제 우리 둘 다 40대, 생업에 종사하고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4주 동안 들어왔는데 말 없이 나가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연락을 했다.


    약속 장소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와 다른 친한 친구 한 명을 같이 만났다.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중년 아저씨들인데, 마음에서 보이는 것은 그 시절 교복을 입은 그들의 모습이었다. 같이 축구를 했었다. 20대 초반, 함께 여행도 다녀오고 술자리도 자주 했었다. 하지만 난 이들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도대체 난 무엇을 하느라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온 것인가.


    난 깎여야 할 곳이 많은 모난 돌이었다. 술자리에서 정신은 잃은 내 뒷치닥거릴 해 준 것도 친구 A 의 몫이었고, 여행지에서 실랑이가 있었을 때 중재한 것도 친구 B 였다. 15년 전 나의 도전을 응원해 주고 저녁 먹여서 보낸 것도 바로 이 친구들이었다.


    작년에 친구 A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사람 명줄은 어쩔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친구 앞에서 사과를 했다. 취기를 빌어 이전 나의 미성숙한 행동들에 대해 사과했다. 40대의 눈으로 바라본 나의 예전 10-20 대의 행동들은 참으로 철이 없고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나와서 반겨준 그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던가. 앞만 바라보고 힘 주며 인간 관계를 지탱해 왔던 지난 15년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았었다. 가치없었던 여정은 아니었지만 얻은 게 많았던 만큼 잃은 것 또한 컸다.


    그들의 시간에 감사했다. 아직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것에 감사, 앞으로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더 자주 보자는 약속에 대해 감사, 그리고 아직 우리들이 건강하게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 힘겨운 세상에서 묵묵히 가족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용기에 대해 감사했다.


    지난 몇 개월간 큰 일에 도전을 했지만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역시 인생은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쉽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넘어진 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죽기 전까지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것, 사람은 그 정도의 일 밖에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Camelback Echo Trai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