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바닥에 있다니
그의 얼굴이 흐릿할만큼 시간이 꽤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락은 갑작스러웠고, 겨우 평온함을 찾은 것처럼 보이는 내 일상에 큰 변수가 되었다.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니 만나서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통보에, 마지막이라 강조하며 묘하게 죄책감을 주려는 단호한 말에 나는 몇번을 저항하며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또 굴복하고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나는 공항 국내선 도착층에서 그를 기다렸다. 차단했던 전화번호를 풀고, 비행기가 지연되었는지 조금 늦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내가 앉은 의자 옆자리에는 내 또래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가 유모차에 딸을 태우고 일어설 채비를 하는 동안, 주변에 앉은 할머니들은 아기가 너무 예쁘다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기의 시선이 할머니들을 지나 나에게까지 왔다. 나도 저렇게 예쁜 딸 하나 갖고싶었다. 나는 웃으며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만 비극이었다.
그에게 문자가 왔다. 대체 어디 있느냐는 연락이었다. 나는 내가 서있는 게이트를 알려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까, 낯선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저 구석에 아까부터 서있던 남자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이었다. 아까부터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충격이었다. 그는 내가 평생을 같이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폐인이었다. 머리는 정돈한지 한참 된 것 같았고, 안색은 어두웠으며, 시선은 불안정했다.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나온것 같았다. 나는 가슴이 아프고, 속상하고, 괴롭고, 부끄러웠다. 잘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예쁘게 하고 나온 나는 이렇게 그를 대면한 현실이 괴로웠다.
이야기 할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나는 앞서 걸었고, 그는 나를 따라 걸었다.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고 나는 내가 두려운건지 화가 난건지 알 수 없었다. 몹시 불안했다.
그는 내게 할말을 글로 정리해서 들고 왔다. 자기 할 말을 다 전하지 못할까봐 글로 쓰는 건 내가 참 좋아했던 그의 습관이었다. 단정하고 유려한 글씨체로 생각을 정돈하는 모습도 좋았고, 나에 대한 마음을 고심하여 쓴 글로 전해줄 때면 그 사랑놀음이 너무 행복했다. 나는 그게 좋아서 그에게 카드든 편지든 짧게라도 써달라고 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받은게 오랜 세월이어서, 나는 혼자 남겨진 집 안에서 제일 큰 종량제봉투 안에 모든걸 쓸어담아 버렸었다. 실없는 지난 생각이지만 그가 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작년 그때가 떠올랐다.
새로운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고집을 부려 어렵게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게 의미 없을 만큼 그의 주장에 변한게 없어서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억울하다고 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건, 그렇게 해야만 내가 정을 다 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 여자와 성관계는 없었으며, 마음 준 적도 없다고, 오해라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나와 헤어지고 싶었다고, 그렇지만 결혼한걸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지금은 회사에서 바람피운 사람으로 소문이 나 너무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그리고 다시 자신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을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아주 일방적이었다. 자신의 입장만 반복하는, 비겁하고 자기중심적인, 자기연민에 흠뻑 취해 나에대한 죄책감은 조금도 담기지 않은, 이혼을 말하고 나서부터 그에게 끊임없이 들었던,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콘크리트 벽을 두들기는 심정으로 말했다. 나는 너무나 후회한다고. 네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에 조금 나은 것 같은 기분이지만, 이렇게 책임감 없는 너랑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은 내가 원망스럽다고. 제발 마지막이라는 말 좀 지켜달라고. 제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마주치지도 말자고. 절절한 부탁이 그에게 닿지 않을게 뻔했지만 그래도 또 애원했다.
그는 대화를 마치고 바로 떠났다. 나와 있는게 싫은듯, 어쩌면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한 자기 모습이 자존심이 상한듯 했다.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던 나를 배신하고, 스스로 혼자 자기만의 비겁한 길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길게 보지 않고 나도 내 길로 돌아갔다. 긴 인생에서 잠깐 마주친 인연일 뿐이다. 살다 자연재해처럼 닥친 재앙이다. 재앙이 맞다. 소중하게, 아끼고 지키려 애를 쓰던 사랑은 재앙이 맞았다.
그 만남 이후로, 한달이 되지 않아 나는 내 발로 정신과를 다시 찾았다. 계기는 만난지 오래된 선배의 안부 전화였다. 결혼 생활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는 그에게 내 소식을 전하다 약간의 과호흡이 왔다. 정신과 의사는 자율신경계에서 오랜 기간 누적된 우울과 불안이 확인된다며 약을 먹어보자고 권했다. 서초에서 와서, 이혼 사건을 많이 겪어 보았다는 그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짧고 담담하게 위로해주었다. 비상식적인 사람과 얽혔을 뿐이라고. 아무 문제 없다고. 괜찮을 거라고.
수치스럽고 비참한 내 사생활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세세하게 적게된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 이혼이 확실해졌을 때, 가족 친구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괴로웠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이혼이라는게 어떤 마음을 겪게 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와서 암담했다.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워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면 지금은, 바닥까지 내려와서 홀로 쪼그려 앉아있는 마음 내가 잘 아니까, 누군가 또 바닥에 내려가있다면 조금 더 외로울까 싶어서. 과거의 외로웠던 나를 위해서 끊이지 않고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