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무의식의 세계가 궁금할 때

쓰기와 예술

by 정물루

2021년 초에 퇴사하고 백수가 되었다. 9년 정도 다니던 광고회사를 스스로 그만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어렴풋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상세하게는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뛰어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회사원 워킹맘이었을 때는 오히려 삶이 단순했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육아와 집안일은 함께 살던 헬퍼에게 아웃소싱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관리와 감독만 하면 되었다. 물론 그 헬퍼를 뽑고 함께하는 살아가는 리듬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 몸이 회사 사무실에 있어야 하니 아무래도 내 정신과 마음이 육아와 집안일에 전부 쏠리지는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식이라고 할까.


퇴사 후, 나는 백수가 되리라 생각했다. 회사에 9-6로 있어야 하지 않고 집에 있으니 일단 헬퍼가 함께 살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헬퍼가 하는 일을 옆에서 보니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여하튼 그렇게 나는 집안 일과 육아의 주체가 되었다. 멀리서 관리와 감독만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직접 하나하나 해야 했다. 그렇지만 집안 '일'은 돈을 가져다주지 않으니 나 스스로도 그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해왔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 상업 디자인과 광고를 벗어나, 순수 예술을 기획하고 싶었다. 국가 주관, 민간 기관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자격증을 따고 독서를 하고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을 하지 않은데 더 바빠진 기분이 들었다. 내 시간도 확실히 더 줄어든 느낌이었다. 꿈을 향해 가기보다는 눈앞의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끝났고 삶이 아주 비효율적으로, 내 상상과는 달리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씩 우울해졌다. 그래서 다시 자기 계발 서적들을 읽고, 관련 유투브, 팟캐스트를 듣다가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었다. 그 책에는 '모닝 페이지'를 써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매일 아침, 의식의 흐름대로 세 페이지 정도의 글을 쓰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냥 아무거나,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니 문법이나 글씨체에 상관없이 써 내려가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면 내 무의식의 감정과 생각이 나오게 되고 그렇게 내가 모르는 무의식 속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닝 페이지를 씀으로써 통찰력의 빛은 변화의 힘과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면 상황에 불평만 하기보다는 건설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모닝 페이지는 우리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해결책으로 안내해준다.


새벽에 가족 중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조용히 앉아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손도 아프고 처음에는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책의 조언대로 8주 동안은 내가 쓴 글을 절대 다시 읽지도 않고 그저 계속 써 내려갔다. 그러자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하지만, 비로소 내가 회사원의 삶이 아닌,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때 펜으로 종이에 쓰면서 위로도 받고 나의 무의식의 세계를 만나는 게 습관이 되어 지금도 무언가 잘 모르겠으면 일단 노트를 펴서 아무거나 쓴다. 두들링을 하기도 한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그렇게 쓰면서 시작했다. 그래서 나를 탐구하는 질적 연구 방식인 '자문화기술지'의 방법으로 연구자로서의 나와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 세계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특정 예술에 반응하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이런 무의식의 세계조차도 내 안에서만 창조되는 것이 아니며 주변 사람들, 처한 상황, 장소, 시간 등 많은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여러 이론을 통해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게는 나의 무의식이 쓰기로 나타나지만, 어떤 작가들한테는 그림이나 조각, 영상 등 다른 매체로 드러난다. 그래서 예술 세계에 더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내 자신을 포함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