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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어도 괜찮아

무의식적으로 끌릴 때

by 정물루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님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늘 마음 한켠에 있었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홍콩 주재 때부터 인듯하다. 세계 곳곳에 갈 수 있는 곳이 무수히 많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또한 끝없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새로운 경험을 쫓는 삶을 살아왔다.


대학에서는 주전공으로 중문과를, 복수 전공으로는 전문영어를 연계전공하면서 체대에 속해있는 동아리에 조인했다. 당시에 새로 생긴 '항공스포츠 동아리'. 인문대생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이 동아리에, 경영학 전공을 하는 기숙사 친구와 둘이 용감하게 들어갔다. 열기구와 패러글라이딩이 주요 종목이었는데, 체력이 기본 베이스인 체대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의 저질 체력은 늘 민폐였다. 그래도 묵묵히, 꾸역꾸역 따라다녔다. 엠티도 가고 밤새 보드게임도 하고, 고급 체력이 기본인 항공대와의 협동 모임들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또 다른 세계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 공부에 몰두하다 대학에 온 과 친구들은 대부분 외모나 연애 이야기로 1학년을 보냈다. 반면, 몸과 마음을 훈련해 온 체대 친구들의 세계는 또 다르게 열려 있었다. 그런 차이를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나는 또 하나의 넓은 세상을 발견하곤 했다.


졸업 후에는 대기업 공채로 운이 좋게 들어갔다. 200명 신입 공채 중 여자는 30명 남짓이었다. 참 이상한 비율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 신입 연수는 끝이나고 팀 배치를 받고 나서야 왜 그런 비율이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모든 팀장이 남자였고, 대부분의 업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탑다운 구조였고, 자유로운 나에게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다 학부 때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근무하는 작은 전시 공간 디자인 회사에 놀러갔다가, 나는 그대로 이직을 결심했다. 월급은 반토막 났지만, 그럼에도 더 넓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의 20대는 전시 공간 디자인과 해외 출장으로 뒤섞인 시간이었다. 출입국 스탬프가 더 이상 찍을 자리가 없어 페이지 연장을 해야 했던 여권을 들고, 나는 쉼 없이 출장을 다녔다.




그리고 30대에는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이 후로는 '세상은 넓지만 갈 수 없고 할일은 많지만 해야할 일이 더 많은' 삶이 되었다.


학부 때 친했던 친구들 10명 모임이 있다. 이 중 아이 둘을 키우면서 회사 생활을 하는 친구는 단 한명 뿐이다. 라이라 샤와(Laila Shawa)의 '불가능한 꿈' - Impossible Dream이라는 작품을 보고 묘하게 우리 친구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비슷비슷한 상황에서 살아간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아이스크림처럼, 지금의 현실 때문에 잠시 보류해야 하는 즐거움들이 코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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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했을 때는 실제로 이 그림 속 상황을 겪었다. 쌍둥이라 임신 당뇨 수치가 약간 높았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무리가 갈까봐 그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단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지금도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밤마실이나 여행은 가지 않고 몸에 좋은 식사를 준비하려고 늘 노력한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었던 그 기분 - 샤와의 그림은 그걸 그대로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웃기기도 했고, 또 묘하게 안심되기도 했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나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또 동시에 ‘왜 이렇게 이기적인 감정이 들지?’ 하는 묘한 죄책감도 올라왔다. 우연히 들은 팟캐스트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기적인 마음은 인간이라면 당연하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이렇게 느껴도 되눈 거구나.


존 듀이(John Dewey)는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에서 예술을 삶 속에서 응축된 '완결된 경험'이라고 정의했다. 일상은 흐르고 사라지지만 그 중 어떤 순간들은 감정과 마음이 하나로 엮이며 뽀족하게 떠오른다. 듀이는 이 순간이 바로 '경험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순간은 언제나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이다. 한 개인의 경험이지만, 그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사회와 규범, 트렌드, 제약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샤와의 작품 역시 얼핏 보면 단순하고 귀엽고 웃기기도 한 이미지인데, 그 안에서 나는 내 삶의 희노애락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작가지만, 동시대를 사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삶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었다.


듀이의 말처럼, 예술이란 결국 이런 순간 - 삶의 각각의 조각들이 한 점으로 모이면서 탄생하는 경험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서 이 작품 앞에서 내가 느낀 이기심, 위안, 공감은 너무 자연스러운 경험이고, 그래서 예술이 우리에게 더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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