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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

[장애인인식개선칼럼] 보편적극단 '인형의 집'이 보여준 당연한 미래

글 ㅣ 최봉혁 칼럼니스트 ㅣ 직장내 장애인 인식개선 전문 교육 강사

미아리고개예술극장 무대 위, 노라를 연기하는 마두영 배우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의 목소리에는 설렘과 고민, 갈등과 열정이 섞여 있다. 그 뒤로 다섯 명의 배우들이 하나의 호흡으로 움직인다. 이 무대에서는 어떤 배우의 몸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선이 머무르지 않는다. 장애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는 공간, 30년 기자 생활 동안 수많은 무대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운 통합의 현장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인형의집마두영.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마두영

통합이 당연해지는 순간

보편적극단의 '인형의 집'은 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의 경계를 의미 없게 만든다. 마두영, 신강수 배우는 노라, 토르발 등의 주인공으로 서슴없이 무대를 장악한다. 프로그램북에 적힌 마두영 배우의 "세상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서 조금은 따뜻해지길!"이라는 말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 되어 가는 무대의 모습을 증명한다.

신강수 배우의 "나도 남자라고!"라는 당당한 외침은 이 무대가 단순한 공연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가 부여한 '장애인'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순간이다. 관객들은 어느새 '장애인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배우'의 연기에 푹 빠져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다.

인형의집신강수.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신강수

우리 모두가 인형이라는 깨달음

입센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노라뿐만 아니라 토르발도 사회적 기대에 갇힌 '인형'으로 그려낸다. 연출가 박상봉은 "외모와 역할에 갇힌 우리 모두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무대 위에서 장애는 더 이상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공 강박, 가부장제, 사회적 시선에 갇힌 우리 모두의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된다.

한 장면에서 토르발을 연기하는 신강수 배우는 사회가 기대하는 '남자다움'의 틀에 갇혀 스스로를 속여가는 인물을 연기한다. 그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가? 장애인이라는 딱지, 나이든 여성이라는 딱지, 대기업 직원이라는 딱지...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가 기대하는 '인형'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인형의집윤희지.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윤희지

경계를 넘어선 연출의 힘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미아리고개까지, 무대는 일상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동시에 펼쳐지는 여러 장면들, 교차되는 내적 독백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 깨닫게 한다. 지하철 역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길거리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누구는 걸어가고 누구는 휠체어를 타고 가지만, 우리가 향하는 방향과 바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연출은 의도적으로 장애와 비장애의 대비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를 흐리면서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부각시킨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가 사회라는 인형의 집에 갇힌 인형"이라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인형의집이윤재.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이윤재

모두를 향한 진정한 초대

이 공연은 폐쇄형 자막해설과 음성해설, 휠체어석을 갖춰 모든 관객을 진정으로 환영한다. 3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접근성은 이제 예술의 당연한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무대 위의 통합이 객석의 통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구조가 여기에서 완성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 '공연예술시설 접근성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587개 공연장 중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시설은 382개관(65%)에 불과하다. 자막 또는 음성 해설을 제공하는 공연은 30%에 그친다. 이런 현실에서 보편적극단의 접근성 시스템은 모범사례로 빛난다.

인형의집이지현.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이지현

숫자로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 현주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현재 국내 장애인 고용률은 36.2%로 비장애인 고용률 62.1%의 약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장애인 임금격차 또한 여전히 28.7%에 이른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장애인의 참여는 더욱 제한적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전문 예술인 중 장애인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이런 수치들이 말해주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접근성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인식의 장벽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장애인을 위한' 무대를 이야기할 때가 많다. 하지만 보편적극단의 '인형의 집'은 '모두를 위한' 무대, 더 나아가 '당연한 무대'를 보여주고 있다.

인형의집개요2.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인형의집


무대가 사회를 앞서갈 때

역사적으로 예술은 사회 변화의 선도자 역할을 해왔다. 30년 전만 해도 여성 배우의 무대는 제한적이었고, 신체적 조건이 다른 배우들의 무대는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경계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경계를 허물어가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보편적극단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특별한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무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장애인의 예술 참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사회, 그것이 진정한 포용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변화된 시선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돌아보면, 관객들의 얼굴에 평범한 감동이 스민다. '장애인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훌륭한 배우의 연기'에 대한 감동이다. 이 미묘한 차이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준다.

한 관객은 "처음에는 장애인 배우들의 연기가 궁금해서 왔지만, 공연이 시작된 지 10분 만에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냥 좋은 배우들이 하는 좋은 연기에 빠져들었을 뿐이다."

인형의집접근성안내.JPG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무대, 보편적극단=접근성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제안

우리 사회의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해서는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문화예술 정책에서 접근성과 포용성을 기본 조건으로 설정해야 한다. 공연장의 물리적 접근성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장애인 예술가들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둘째, 교육 과정에서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 때부터 다양한 신체 조건을 가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그들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셋째,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장애인 예술가를 단순한 '귀감'이나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예술가'로 조명하는 보도가 필요하다.


당연한 미래를 향하여

보편적극단의 '인형의 집'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언제부터 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특별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 그리고 언제쯤이면 이러한 무대가 '당연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이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배우들이 함께 무대 중앙으로 모여드는 순간,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의 모습을 무대 위에서 실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공연 문의: 미아리고개예술극장, 2025.11.9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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