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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Apr 17. 2024

아주 오만한 글, 명품학부모 안내서

4. 지금, 학교는 흔들리고 있지만

학교 되돌아보기 - 암전의 시대

  우리나라 교육계에 있어 2010년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경기도에서 최초로 학생인권 조례가 제정,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조례가 시행되기 전인 2011년 이전의 긴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인권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세상도 교육권이 인권 위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때였다. 그런 시대를 학생으로 살아왔음에도,  학생으로서의 인권에 그리 부당함을 느끼지 못한 이가 있다면, 그는 그냥 몇 안 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운 좋은 학생이었을 것이다. 말해 뭐 할까?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학부모의 인사도 '우리 아이 잘못하면 많이 때려주세요'가 적지 않았고,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속담이 사회 통념인 때도 있었다. ‘매’의 역사는 김홍도의 서당그림에서도 보일 정도로 제법 뿌리가 깊다.


  일찌감치 체벌을 앞세운 교육에 대해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0년 이전을 조금 과하게 표현한다면, 사회 전반적으로 매와 교육권은 동일시되었던 시대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000년대의 어른들은,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시절이 많이 달라졌지만, 학교에는 아직 ‘매’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격변을 거치면서 바야흐로 인권의 시대를 구가하던 때였음에도, 아직 학교에는 체벌 문화가 잔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식을 학교로 보내는 학부모들은 속앓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체벌에 관한 지난 시절을 그저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승화시키고자 했지만, 자녀들에겐 아직도 현실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시기는, 사회에선 잘 모르겠지만, 교단에서도 체벌의 비인격성에 대한 성토가 적잖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2000년대의 학부모들은 인권의 시대가 도래한 마당에 자식들의 눈앞에 여전히 놓여 있는 교편(회초리)은 아무래도 불편했을 것이다.


학생 인권

  2011년 이후로 학교는 선생님들에게서 '매'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매'를 놓은 채 맨손(?)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매가 사라진 교실이 낯설어 처음엔 쭈뼛거렸지만, 금세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반면 학생들을 이끌기 다소 어려워진 측면이 있었으나 선생님들도 점차 맨손(?) 수업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면 괜찮았을 것이다.


  교육이 아닌 법률 규정이 하나 더 학교 안에 ‘툭’  던져졌다. 바로 학교폭력 예방에 관한 법률이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진 몰라도, 혹은 다르게 판단하는 전문가들이 있을지 몰라도, 저자의 눈엔 아무튼 시기적으로 '법'이 직접 학교로 뛰어들자 곧 선생님들의 학생 지도권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학생들 간의 다툼을 교사는 더 이상 지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전의 ‘서로 사과하고 친구끼리 잘 지내도록 하자’는 선생님의 교육이 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법이 생겼으니, 법으로 하겠으니, 선생님은 누구 편도 들지 말고 저쪽에서 잠자코 있으라는 것이다. 교사의 교육권은 법률 앞에서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학교폭력에 관한 한, 선생님 대신 학부모가 직접 나서도록 촉구되는 까닭에, 학생들 간의 갈등을 교육적으로 승화시키려는 선생님의 권위는 순식간에 제3자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고 말았다.


  SNS 권력

  한 줌도 안 되는 무너진 교권이, 완전히 부서지기 시작한 곳으로 ‘온라인 학부모 모임’이라는 가상공간이 강하게 의심받고 있다. 요즘의 방송매체도 공공연히 그런 의구심을 감추지 않는다. 전문가 패널들은 교권 붕괴는 지금도 진행형이라며 SNS의 부작용에 혀를 차곤 한다. SNS를 통해 학교와 선생님을 어떻게 혼내주고 어떻게 묵사발을 만들었는지 하는 등의 경험이 공유된단다. 어떻게 학교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서로 노하우를 나눈단다. 온라인 뒷방인 단체톡방이란 곳에서 교사들과 교장들이 어떻게 능멸되고 있는지 아느냐며, 뉴스 앵커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온 세상에 이런 학교 사정을 연일  보도하는 중이다.

학교를 둘러싼 학교 문화가 너무 많이 손상되고 있다. 교사와 교감, 교장까지 학교 구성원 모두를 향한 학부모들 눈빛에 적의가 깃들어 있다. 학교 내 공기도 심상치 않다. 교장, 교감과 교사들도 서로를 보는 눈이 점점 삭막해지고 있다.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교사들은, 교장과 교감이, 교사의 처지를 돕기는커녕 학부모들의 눈치만 본다며 원망한다. 교감과 교장은 허탈하기만 하다. 교육을 압도하는 학교 법률, 법령 아래에서 자기들에게 무슨 힘과 권위가 있어, 학부모를 교육적으로 설득하고 기세를 진정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학급 관리를 좀 더 잘하지 그랬냐는 불만이다. 교권으로 교육하지 못하고 법률로써 교육을 통제하게 된 지금 우리 학교 사회의 극단적인 단면이다(가령, 학생 간 다툼을 교육적으로 지도하는 대신, 학생을 대리하는 학부모들이 직접 나서서 상호 간 잘잘못을 따지도록 하고, 징벌로써 마무리 짓는 체계가 굳건히 자리 잡았다. 따라서 이전의 교사의 생활지도로 학생들을 교육하던 교육은 완전히 밀려나있다. 그래 놓고 세상은 또 학교에게 왜 학생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느냐, 그게 선생이고 학교냐며 따지는 이율배반의 폭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이렇듯 학교로 뛰어든 법률은 지금 교권을 거의 완전히 밀어내었다. 학교와 학부모는 물론, 교장 교감과 교사들 간, 나아가 교사들 사이까지 이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어줍잖은 교육력으로 지도하려다 큰코다치지 말고 비켜서란다. 법률의 힘이어야 한다며, 미약한 학교의 교육력 대신 더욱 확고하게 학교의 중심 자리에 서서 법률의 힘으로 교육(징벌과 위협이 교육인가?)하겠다 나서고 있다.


  법률의 힘을 손에 쥔 것은 학부모이다. 법률의 힘을 손에 쥐려면 당연하게 이전에 쥐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학부모들이 이전에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바로 교육적 유보였다. 담임교사와 함께 자녀를 교육하는 교육 동반자로서의 학부모의 마음가짐이었다. 아이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고 교육하기 위해 담임교사와 마주 앉아 상담하고, 전화로써 소통했던, 교육적 유보였다. 이러한 미덕이야말로 교사들의 학생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힘이었다.


  그러나 교육적 유보를 내려놓고, 학생 인권과 학교 폭력에 관한 법률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는 지금, 학부모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담임 선생님과 마주 앉지 않는다. 대신 SNS 카페에서 학부모들끼리 만나 두 개의 법률의 사용법에 대해 열공 중이다.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작은 일일지언정 어떤 법률조항을 들어 자녀를 부당함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을 얻기 위해서다. 학부모 온라인 카페는 이처럼 교육적 슬기보다는 법률적 지혜를 나누기 위한 분위기로 완전히 색깔 변화를 완료한 듯하다. 그곳에선 법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 공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SNS 맘카페는 학부모 권력의 생산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와 교육을 의논하는 대신, 학교의 모든 것이 성토되기 시작한 것 같다.


거의 다 식은 교육열

  교실 곳곳에서 영혼 없는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선생님은 아이를 만류할 수도 따로 남겨 지도할 수도 없다. 아이의 뒤에 강한 대리권을 행사하는 학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겨우 수업을 끝내고도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의 전화를 피할 수가 없다. 아이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왜 선생님은 태도를 고치지 않느냔다. 선생님께의 도전에 성공한 아이와 선생님을 꾸짖어 사과를  받아낸 학부모는 유사한 행위를 반복한다. 선생님은 자괴감을 이겨내기 어렵다. 스스로 무너진 선생님께 또 누군가가 똑바로 서라며 채근한다. 겨우 통화를 마친 선생님은 자괴감 너머를 생각한다.


  학교는 학부모를 이길 수도, 이기고 싶지도 않지만 학부모가 학교를 이기는 순간이야말로 학교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사회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는 것만 같다.


  사회적 인권과 구분하여 학생 인권이라 칭하려면, 학생 인권이 사회적 인권과 무엇이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 정의했어야 했다. 학생 인권에 대해 교권 또한 새로 해석하여 나란히 세웠어야 했다. 하나의 스틱만을 가진 스키 선수가 속도를 높일수록 자꾸만 몸이 뒤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극단은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학교가 무너진 데 대해 사회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좀 더 깊게 생각하여 이번에야 말로 부러진 한쪽의 스키 스틱인 교권을 제대로 고쳐 주어야 한다. 온전한 스틱을 교사들의 손에 쥐어 주어 교육이 다시 균형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


학교가 잃어버린 것 

  학교는 손해를 좀 보았으나 보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며, 아량의 마음을 기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조금 억울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을 기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잘못에 대해 위원회가 내린 징계처분으로 잘못은 말소되었다는 의식이 아니라, 교사의 교육을 통해 잘잘못을 깨우쳐 진심의 사과를 주고받으며, 학부모도 더불어 화해의 성장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다들 듣고 있겠지만, ‘학폭’에서 싸운 두 아이는 이미 화해하여 잘 놀고 있는데, 부모들 간의 다툼이 계속되어 끝나지 않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학교는 징계로서 서로 간에 가까이해선 안 될 사이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조금 큰 마음으로 용서하며,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고 미안함과 감사함과 나눔과 위로와 우정의 감성 교육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원래 그런 것을 가르치는 곳인데, 그걸 가르치는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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