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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Apr 18. 2024

아주 오만한 글, 명품학부모 안내서

5. 그런데도 왜 학교여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교실이 있다


 ‘이번에 우리 애 담임 선생님, 정말 잘 만났어요、

 아이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요. 감사해요.’ 

가끔 어떤 학부모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내게 (그래도 학교의 관리자라고) 치사를 하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그반 담임 선생님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담임 선생님께 따로 인사를 드릴 생각을 챙기며 학부모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당장 먼저는 학부모에게 감사 인사를 되돌린다.

‘그건 학부모님께서 훌륭하셔서 그런 겁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물론 그런 인사를 되돌려 받은 학부모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사실 대개 학부모는 그런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경우가 많다. 그 학부모가 훌륭한 까닭이다.

‘뭐가 그리 좋답니까, 아이는?’

‘선생님이 자기들 마음을 잘 알아준대요. 그리고 반 전체가 매일 칭찬받는답니다. 반 아이들이 다투고 나서도 금방 사과하고 다시 친해지곤 해서, 선생님께서, 우리 반이 자랑스럽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신대요.’


  답이 나왔다. 한결같이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훌륭하다는 학부모는,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을 존중해 주고, 무엇이 잘 안 되어도 열심히 하는 모습만으로도  칭찬해 주신단다. 끝까지 하는 모습을 격려해 주시고, 자기 것을 다 끝내고 짝꿍을 돕는 모습이 예쁘다고 말씀해 주신단다. 미술 시간이 끝나고 뒷정리 등을 함께하는 모습, 친구의 실수를 용서하고 다투고 나서도 곧 화해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 하신단다. 그건 다 부모님께서 훌륭하셔서 그런 거라며, 아이들에게 부모님까지도 칭찬해 주시곤 하신단다. 


  선생님이 진실로 고맙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학부모 도 아이를 그렇게 기르고 가르치셨을 것이다. 소리쳐 꾸짖기보다는 떼쓰던 아이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하셨을 것이다. 충분히 기다려주고, 칭찬하는 이유를 들어가며,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을 것이다. 가만 안아 주어 아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셨을 것이다. 약속이나 작은 규칙을 지켰을 때 몹시 대견스러워해 주셨을 것이다. 이웃에서 놀러 온 아이가 자기 물건을 가지고 놀 때, 함께 나눌 줄도 아는 아이였느냐며 감동해 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보다 먼저 부모님이 훌륭한 분이셨을 것이다. 그러니 학부모님은 마땅히 감사 인사를 돌려받을 자격이 충분한 분이실 것이다.



  원천적으로 교육의 권리와 의무는, 직박구리 어미새에게처럼, 부모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직박구리처럼 자식을 기르며, 직접 가르쳐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의무교육이라지만 이러한 학부모 직접 교육이 아예 닫혀있는 것만은 아니다. 홈스쿨링이라는 이름의 학부모 직접 교육을 실행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분들은 대단한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 단계별 교육과정을 꾸리는 일과 공부의 위계를 탐구하여 적절하게 가르치는 일, 심신의 어느 한 측면이 일그러지지 않게 균형을 맞추어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나라는   학력이 매우 중시되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학부모 들도 교과 교육이 곧 학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실제 학교의 교육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이들을 일대 일로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 모아서 가르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 사는 세 상이란 것이 함께 모여 어울려 사는 것을 속성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모여 살며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더불어 잘 지내려면 사회에서 정한 도덕과 규범과 질서를 ‘모임 속’에서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국가가 학교에 부여한  학교의 목표는  ‘건강한 사회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교육의 목적은 제 각각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사회적인 정의를 따르고자 한다. 학교의 사회적 목표는 대체로 '건강한 사회인의 재생산'에  있다. 이러한 학교의 목표는 결코 교과공부만으로는 달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인의 재생산’ 짧지만 수없이 많은 의미가 이 열 글자 속에서 와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건강한 사회인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있을까? 간단하다.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지, 덕, 체 교육이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교과 교육으로 지적 성장을 도모하여 사회를 읽고 해석하고 생각할 수 있게 가르치며, 사회적 규범이나 질서, 예법,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감성과 정서, 연대와 협력을 가르침으로써 사회 적응력을 길러준다. 신체적 성장, 신체 기능을 다양하게 발달, 분화시켜, 건강하게 살아가며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왜 자녀를 직접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걸까? 우선 부모가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녀를 직접 교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큰 용기를 내어 직접 자녀를 교육하기로 하였다고 할 경우 잃는 것이 너무 많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홀로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인 까닭이다. 아이도 성장하여 남과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는 꼭 사회적 역량을 배워야 하는데, 부모와 아이의 관계 만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부모가 직접 자녀를 교육할 경우, 자녀는 또래 관계 속에서 길러지는 함께하기, 질서(차례) 지키기, 책임지기, 연대하기, 협동 협력하기, 약속하기, 양보하기, 이해하기, 공감하기, 용서하기, 용서 구하기, 나눠 주기, 베풀기, 우정 나누기 등의 사회적 가치를 가르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교과 지식 외의 사회적 역량은 학교에서 매일 함께 하는 또래들과 ‘함께’, 또래들 ‘사이에서’ 배우고 익히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직접 자녀를 교육하는 홈스쿨링 가정의 경우도 교육의 사회적 목표인 ‘건강한 사회인의 재생산’에 주목해야 한다. 부모의 입장 입장에서도 자녀가 이 사회에 잘 적응하여 살아가게 하는 목표만은 저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이미 또래들이 모여있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역량을 배우기엔 학교가 최적인 것이다.  그러한 교육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인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학교는 국가적 차원에서 정밀하게 연구된 교육과정을, 국가가 공인한 교육 전문가(교사)를 통해, 보다 충실하고 다양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국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또한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학교는 더욱더 공교육 기관으로서 신뢰를 쌓으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회적, 시대적 요구를 계속 수용하면서 진화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옛 조상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개별 가정의 밥상머리 교육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건강한 사회인을 교육하는 ‘책상머리 교육(?)’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요즘은 건강한 사회인을 간단히 ‘시민’이란 용어로 바꿔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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