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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Aug 24. 2022

선 좀 그어주시겠어요?

제주살이 7일차 2022년 8월 7일

또 실수했다. 그것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실수. 뚫린 입이라고 다 뱉어댈 수밖에 없는 게 내 성격이라면 묵언수행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어쩌다 말을 하게 되었을까.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손을 쓴다는 것보다 문자 체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게 아닐까. 아 다르고 어 다른 섬세한 문자의 세계에서 적절한 단어를 골라 집어 적절하게 배치하고 적절한 톤과 적절한 빠르기로 말하는 게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어렵다.


사건의 정황은 이러하다. 게하 스텝으로 일한 후 처음으로 회식 자리를 가졌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 자고 싶은 마음보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리고 lays 감자칩 치즈맛이 너무 맛있었고 뒤이어 먹은 말차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 중독자인 나의 모습을 모두에게 공개하기 충분한 맛이었다. 이상형 이야기로 모두가 하하호호 웃다가 분위기에 취했으며 이 자리가 '편하다'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내 마음속 흑염룡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퉤엑-


나는 늘 그랬듯이 자기중심적이어서 온전히 남을 배려한 적이 없었다. 착한 척만 할 뿐이다. 그렇게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다 보면 간혹 나도 모르게 내 이기적인 마음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눈치 빠른 사장님이 그걸 캐치하고 나에게 선을 그었다. 당황, 민망, 두려움도 잠시 일주일도 안 본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는 게 고마웠다. 그래서 서둘러 죄송하다고 말했다. 뒤이어 감사하다고 하려는데 ㄱ까지 밖에 말을 못 했다. 말을 다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목구멍 너머로 말과 눈물을 같이 삼켰다.


사회생활하면서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선을 어떻게 긋는지도 어떻게 지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 없이 자랐기 때문이다. 선이 없으니 누군가 멋대로 나를 헤집고 가기도 했고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선'의 필요성에 동의한다. 나의 마음에도 너의 마음에도 개인 공간이 필요하니까.


가끔 내가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말을 해도 누군가 나의 마음은 찰떡같이 이해하고 정중하게 선을 그어줄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고맙고 그런 사람들 곁에 있기 위해 노력한다.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오늘도 하나 배웠다. 하지만 실전에서 써먹는 게 맘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맘 속으로 부탁한다. 선 좀 그어주시겠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산책을 했다. 제주도에 혼자 있으면서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골에서 지내다 보면 말 그대로 '먹고 사느라 바쁜'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고민에만 빠져 있을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여유이고 시대를 잘 타고난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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