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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01. 2022

내가 제주도에 온 이유

제주살이 15일차 2022년 8월 15일

이틀 전에 카페보다 마트에서 먹고 싶은 과자 몽땅 사는 게 더 싸다는 걸 깨닫고 마트만 주야장천 가고 있다. 어딜 가나 널려 있는 공장제 과자를 제주도까지 와서 사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스스로 한심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과자를 샀다. 공장제 과자는 너무 자극적이어서 한 번 먹으면 계속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한국 과자는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들었네!'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용량 대비 가격이 매우 비싼데 나는 차라리 가격이 더 올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예 사 먹을 생각도 안 나게 말이다.(그냥 안 사 먹으면 될 걸... 어휴!)


숙소로 돌아와 과자 봉지를 뜯었다. 단짠단짠. 때로는 맵느맵느. 자극적인 맛이 침에 녹아내리자 뇌의 한 구석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뿜어져 나왔다. 펑펑! 행복 호르몬으로 만들어진 불꽃놀이는 너무 달콤했다. 하지만 그것도 혀에 음식물이 닿는 그 순간뿐이었다. 목구멍 아래로 넘어간 음식물은 위장에 차곡차곡 쌓였고 속은 점점 불편해졌다. 머릿속에서 불꽃놀이를 만들어 주던 행복 호르몬도 텅 빈 과자 봉지와 함께 떨어졌다. 나의 '스트레스 풀기 의식'이 끝났다.


문제는 이 의식을 치르고 나면 똥배가 튀어나와 스트레스가 더 생긴다는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학창 시절 잘못 들인 습관이 20대 후반이 되어가는 나를 여전히 괴롭힐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싸구려 간식에 중독되었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이상한 자세로 섹스를 하고, 마약을 하면서 잠시 현실 도피를 하듯이 나는 싸구려 팜유에 튀겨지고 MSG 범벅인 공장제 과자와 진짜 우유라곤 10%도 안 들어갔으면서 값은 계속 오르는 공장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현실 도피를 한다.


과자 봉지를 버리려고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다. 통 안에 가득한 과자 봉지를 보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둘러 일어나 창문과 방문을 닫았다. 펑펑! 걷잡을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오늘로 매일 운 지 15일째. 제주도에 온 지 15일째. 제주도에 와서 지금까지 안 운 날이 없다. 며칠 전엔 사장님들이 안부 인사 차 "낮엔 뭐해요?"라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방에 틀어 박혀서 울어요."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사실 나는 제주도에 울라고 왔다. 살면서 가끔 목 놓아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서 매번 눈물을 삼켰다. 삼키지 못할 지경이 되면 누가 볼세라 몰래 울고 아닌 척했다. 눈물로 밖에 표현 못 할 감정은 참다 보면 사그라들고 바람에 흩날리듯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응어리가 진다는 걸,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1인실을 갖게 된 것은, 마침 사장님들이 게하 운영을 안 하셔서 식당에만 출근하면 된다는 점은, 그래서 숙소에 하루 종일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기회였다. 가족, 룸메이트, 하물며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집도 신경 안 쓰고 펑펑 울어 재낄 수 있는 기회. 그래서 혼자 방에 있는 동안은 스스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러자 수도꼭지를 튼 것 마냥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떤 날은 정말 울다가 지쳐 잠에 들기도 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정말 다양했다.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에 울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울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마음에 안 들어서 울었고 거기에 아직도 갇혀 있는 내가 너무 무능력해서 울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 낸 것도 내던져버린 내가 바보 같아서 울었고 다시 노력해서 새로운 걸 일궈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울었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모자란 소중한 이들에게는 모진 말을 하면서 스쳐 지나갈 이에게는 쩔쩔매는 나 자신이 싫어서 울었다. 내가 이렇게 자존감이 낮고 나약한 사람인지 몰랐다.



진이 빠지도록 울고 나면 먹구름이 개고 햇빛이 내리쬐듯 정말 개운하다. 그래서 스스로 우는 거에 중독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주 울었다. 그리고 울면서 '이렇게 울다 보면, 다 풀리겠지.' 생각하며 울었다. 그건 아니었다. 울면 울수록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또렷하게 보였지만 그 문제를 풀어낼 방법을 찾는 건 다른 일이었다.


가게 마감 후 가진 회식 자리에서 정신과 상담 이야기가 나왔다. 사장님이 제주도에 상담을 정말 잘해주시는 의사 선생님이 있다며 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꼭 가봐야지 했는데 육지 사람들도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많은 병원이라 지금 예약하면 12월에나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돈 주고 고민 털어놓을 곳 찾는 것도 힘들다.


내가 대화를 해야 할 상대는 의사가 아니라 가족임을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문제의 90% 이상은 가정에서 출발했으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 가족이 내 말을 온전히 들어줄까? 모르겠다. 우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내뱉는 것조차 너무 힘든 사람이다. 속마음을 말하기 시작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사람이 나다. 그래서 항상 말을 못 꺼냈다. 나는 언제쯤 울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눈물샘이 마르고 닳도록 울고 나면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도 펑펑! 눈물을 터뜨렸다.



살 빼는 수고를 덜기 위해 아이스크림이라도 칼로리 낮은 걸 택했다. 맹물 맛이다. 역시 칼로리와 맛은 비례한다.
내가 당 중독이란 것을 함께 일하는 모두가 알게 되었다. 창피했지만 사장님이 구워주시는 마시멜로우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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