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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08. 2022

가난에서 벗어난 날

제주살이 22일차 2022년 8월 22일

점심을 먹다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도 전화를 두 번이나 걸었는데 내가 받질 않아 오늘 다시 했다고 한다. 부재중 기록엔 아무것도 없었다. 8년 지기 고물 휴대폰이 나를 불효자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불효자를 자처한 딸이니까 말이다. 내가 든 감정은 미안함이 아니었다. 엄마가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것이 어색할 뿐이었다.


엄마는 평소와 달리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엄마는 자기가 이제야 철이 드는 것 같다며, 우리에게 해준 것이 없어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울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느라 바퀴벌레를 씹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본인은 남은 평생을 임대주택에서 살아도 좋으니 해외 생활을 꿈꾸는 나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우리 집은 가난하니까…’라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길 바랐다.


난 안다. 엄마가 이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10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최대한 안전한 방향인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주겠다는 돈을 평생 못 만져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동안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당첨금이 곱절로 불어난 로또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뻤다. 내가 평생을 듣고 싶던 말을, 그 말을 해주기 바랐던 사람에게서 들었다. 평생을 애정결핍으로 살았던 내가 이제야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내가 지금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돈, 돈 거리지 않는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그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먼저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겨우 "응.. 응.. 알았어…"라고 대답하며 무미건조하게 통화를 마쳤다. 먹다 만 밥상을 앞에 두고 방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날 붙잡고 있던 족쇄가 드디어 풀려났다. 날 향한 기대와 부담의 시선이 드디어 거두어졌다.



성공해야 된다는 강박이 너무 강했다. 남들은 혼자서 다 해내서 대단하다고 하지만 나는 내 부모보다 더 치열하게 살지 않은 나 자신에게 늘 부끄러웠다. 세대 차이라고 하기엔 당장 유튜브만 틀어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 천지였다. 그래서 계속 모든 걸 혼자 해내려고 하였다. 공부로는 내 부모만큼 해낼 자신이 없어서 돈을 잘 벌자고 생각했다. 자수성가한 인물 탑 100에는 들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집, 가족들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다. 진정한 자수성가의 표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는 외로움이란 쥐약을 먹고 매일 밤 눈물을 흘렸다. 반나절 동안 푹 빠져 읽던 책을 덮는 순간, 밥을 다 먹고 빈 그릇을 모으는 순간, 일기를 쓰고 침대에 눕는 순간… 매 순간순간 외로움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면 그 틈을 없애기 위해 점점 더 많은 할 일을 계획했다. 워라벨 워라벨 부르짖으면서 실은 기계처럼 살 것을 꿈꿨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속에서 멀미로 고통받느라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길 바랐다.


금보다 귀한 게 지금이라고. 시간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똑같이 주어져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하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고작 푼돈을 버느라 낭비했다. 그깟 돈, 잠깐 빌리면 될 걸. 도와달라고 말하면 될 걸. 그 한 마디를 못 해서 최저시급에 목을 매며 일을 하였다. 그렇게 내 시간은 최저시급으로 환산되었다. 나는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만 센 가난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아등바등 모은 푼돈은 나름 목돈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돈을 통장에 고이 모셔둔 채로 벌벌 떨고만 있었다. 벌고 모으는 방법만 알지 쓰고 불리는 방법은 몰랐다.



엄마의 전화 한 통, 딸에게 하는 진솔한 고백이자 사과인 그 전화로 나의 사춘기는 막을 내렸다.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뻥 뚫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온전히 새하얀 도화지가 된 기분이었다. 날 낳아준 사람이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니 나는 이제 더욱 당당하게 내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제주살이가 끝나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거기서 내가 지난 1년간 모았던 시드머니를 탕진하며 돈을 쓰고 불리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설 것이다.



지붕 위에 올라간 고양이 두 마리. 너희들은 발길 닿는 곳 다 갈 수 있어서 좋겠다.
요즘 푹 빠진 영어 필기체 쓰기. 글씨 쓸 땐 다른 고민은 뒷전이고 이 선을 어디서 얼마큼 구부릴까만 생각하게 되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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