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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11. 2022

엄마한테 욕하면서 소리 지르고 쓰는 일기

제주살이 25일차 2022년 8월 25일

월요일에 엄마와의 전화 통화 이후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였다. 마음의 가난에서 말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나는 제주도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부터 나의 혈육에게, 내가 제주도에 있는 동안 놀러 오라고 하였다. 서로의 스케줄 상 8월 말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영상통화를 하며 다음 주에 함께 할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였다. 나의 혈육은 엉덩이가 상당히 무거운 편이라 변덕스러운 제주의 날씨, 비싼 관광지 물가, 그리고 그 경비를 감수하고도 딱히 가고 픈 곳이 없음 등을 이유로 자꾸만 뭉그적 거렸다. 내가 재차 여행경비를 모두 대준다고 말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혈육의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의 혈육은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하면 동행을 구해서 다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제주도를 같이 관광할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굳이 채식주의자인 혈육을 초대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 혈육과 같이 여행할 곳을 마침 내가 있는 제주도로 정했을 뿐이었다. 나는 제주살이가 끝나고 곧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계획이 있는데 그전에 가족들하고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안다. 내가 고집을 부린 거다.


4시간의 영상통화(라고 하고 실랑이라 읽으면 된다.) 끝에 2박 3일간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까지 계속 "나는 이 돈을 써 가면서까지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제주도는 안 당기고 네가 호주에 있을 때 거기에 놀러 가겠다."라고 말하는 혈육에게 서운함이 폭발해버렸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하면서 오지 말라고 하였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엄마가 무슨 일이냐며 화면에 등장하였다. 구경꾼이 생겨 신난 나는 더욱더 지랄을 하였다.


엄마와 혈육 모두 나를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 취급을 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난 어린 시절부터 우울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정상'인 척을 했는데 그 '척'을 너무 잘해서 모두 내가 정상인 줄 알았나 보다. 내가 나의 힘듦을 토로하면 할수록 엄마의 눈은 점점 아래로 기울어졌다. 그 눈빛에서 나는 "쟤가 왜 저럴까."의 메시지를 읽었다. 나는 그 눈빛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화살을 돌렸다.


엄마는 역시나 혈육과 내가 벌이는 싸움의 요지가 뭔지 몰랐다. 요지가 무엇이냐면 당연히 여행을 다닐 '돈'이었다. 그리고 '돈'에 얽힌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다. 우리 집이 제주도 여행을 못 갈 정도로 가난하진 않다. 과거에 가난했던 전적이 있어서 '돈'을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다. 그 방법을 몰라서 우리 가족은 너무 많은 기회를 날려 보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제주도로 온 이유를 아냐고, 틀어박혀서 울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서 왔다고 말했다. 집에는 그런 공간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가족들과 단절되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엉엉 울면서 그동안 참아 왔던 모든 걸 터뜨렸다. 최소 20년은 묵혀 온 문제라서 이야기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의 밑바닥을 가족에게 보인다는 일은 생각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진짜 병이 날 것 같아서 속에 있던 모든 걸 토해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엄마에게 상당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돌변하는 나를 보아하니 아직까지도 나의 가난한 마음은 뿌리가 뽑히지 않았나 보다. '엄마에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더 나이 들면 더 못한다.'는 생각에 뚫린 입으로 다 뱉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말을 하는 순간 그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어? 당황스러웠다. 그냥 말하면 되는 거였다니. 그것도 모르고 평생을 참고 살았다. 어쩌면 제주도 와서 스스로 감정에 솔직해지자고 매일 우는 짓을 반복 훈련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이왕 터놓고 말하는 거 조금 더 예쁘게 다듬어서 전달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쩔 수 없었다. 후회는 없었다.



오늘로 내가 제주도로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초반 일기에 나는 안 해 본 일을 해보려 제주도로 왔다고 쓴 적이 있다. 그 일 중 하나는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하기'였다. 평생을 붙어살아온 가족들에게 말 한마디 하려고 제주도까지 떠나오다니... 가성비를 중시하는 내가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것도 영상통화로 하다니. 참... 현대인답다.



맛있다고 한 솥 끓인 카레를 일주일이 걸려 다 먹었다. 집에서는 하루 만에 없어지는 양이었는데 혼자 먹으니까 참 오래 걸린다.
카레 다음으로 미숫가루 늪에 빠졌다. 혼자 여행 왔는데 미숫가루를 왜 사니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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