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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Sep 29. 2022

제주도에서 찾은 삶의 단서

제주살이 40일차 2022년 9월 9일

스텝일을 하면서 만난 밤이 언니(지난번에도 등장하였다.)와 함께 제주도 베이커리 투어를 하였다. 추석을 맞아 곧 육지로 올라가는 언니가 가기 전에 한 번 더 놀자며 나에게 시간을 내준 것이다. 제주도에서 방구석 여행만 하는 나는 아주 땡큐인 약속이었다. 일행 중에 네발 달린 친구, 귀여운 밤이도 있어서 반려동물 출입이 가능한 베이커리 카페도 가고, 구좌읍이 당근으로 유명해서 당근만 전문으로 하는 카페도 갔다. 연휴 시작이라 다들 집에 있는지 사람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놀 수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자꾸 먼저 지갑을 여는 밤이 언니를 온몸으로 막았다. 내가 밀렸다. 매일 강아지 세 마리를 산책시키고 런데이에 홈트까지 하는 언니를 이길 수 없었다. 미간에 한껏 번데기 주름을 만들며 불만을 표시하였다. '나도 돈 있어요!' 언니는 내가 호주 가서 돈을 써야 한다며(나는 곧 워킹홀리데이를 앞두고 있다.), 본인도 어릴 때 주변 언니들에게 많이 얻어먹었다고 하였다. 아, 그 마음 나도 안다. 열심히 사는 동생들에게 밥 한 끼 사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얻어먹었다.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오조포구에서 산책을 하였다.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옆에는 사시사철 푸른 제주도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포구에 햇빛이 내리쬐어 반짝이는 윤슬이 낮에 보는 은하수 같았다. 신발에 흙이 묻어 나오는 숲길이 걷기 참 좋았다. 동네 산책하듯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걸었다. 꽤 많이 걸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운이 솟는 기분이었다.



지역을 옮길 때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 여기에 살게 되었는지, 여기가 마음에 드는지, 든다면 왜, 안 든다면 왜 그런지. 왜, 왜, 왜?(내 안에 물음표 살인마가 살고 있어!) 다들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참 궁금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자꾸 다른 사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아마도 내가 다음에 하고 싶은 일과 관련이 되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듣던 밤이 언니 왈, “그래도 제주도에 와서 단서를 많이 찾고 가네요.” 그러네, 나는 제주도에 와서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가 끝나가는 이유도 이런 ‘단서’들을 많이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주도에 와서 내가 찾은 단서들


1. 나는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물놀이를 좋아해서 바다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바다는 너무 짜고 무섭다. 나는 염도가 낮고 제한된 공간에 있는 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계곡이나 목욕탕 정도가 딱 좋다. 서핑 샵 근처에 묵으면서 한 번도 서핑을 하지 않은 것이 내가 바다의 넘실거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겠다.


2. 나는 외로움을 엄청 많이 타는 사람이다. 자연 속에서 있는 걸 좋아해서 반경 3km 이내엔 이웃이 없는 시골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가평과 구좌읍에서 살아 본 결과... 나는 시골에서 못 사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북적거리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며 사는 게 나에게는 더 잘 맞는다. 너무 시골도 너무 도시도 아닌 딱 그 중간이 좋다.(지방 도시...?)


3. 나는 요리하는 것보다 먹는 걸 좋아한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내가 요리한 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장래희망' 칸에 요리사를 적었고 얼마 전까지 그러한 꿈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일까지 하고 나서야 이 일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업으로 삼아서 할 만큼의 재능과 열정이 나에게는 있지 않다. 너무 허무해서 씁쓸하지만 주변에서 ‘아직 젊으니까~’라고 계속 말해주시는 걸 위안 삼으려 한다.


4. 나는 먹는 것보단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요리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것도 실은 주방이라는 공간을 좋아해서 생긴 결과였다. 우리 집은 주방에서 참 많이 떠들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와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글을 발행한 것도 같이 떠들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5. 나는 ‘어느 정도’ 통제된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끝없는 경쟁 사회에 넌더리가 났다. 경쟁의 우위에 서기 위해선 이러저러한 것들을 통제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변해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자발적 백수로 제주살이를 40일째 한 결과... 내겐 무한한 자유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느 정도'만 통제된 상황을 좋아하는 것 같다.


써놓고 보니 이 모든 게 내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자라면서 얻은 특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냥 그곳 출신인 사람인 것을 떠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그럼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가면 되지 않나 싶지만... 내가 10살 때부터 살아온 ‘우리 동네’는 신도시 개발로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게 되었다.(집 값이 너무 올라서 미래를 꿈꿀 수가 없다.) 내가 떠돌아다니는 이유가 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놀러 다니는 게 좋아서도 아닌 제2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였다니... 어째 나의 <제주살이 일기>가 점점 현대판 <삼포 가는 길>이 되어 가는 듯하다.


궁금해서 시켜 본 당근 빙수. 궁금해하지 않아도 됐었다.
유행하는 포즈로 사진 찍어보기. 유행 지난 지 꽤 됐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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