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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Oct 08. 2022

나, 서핑에 빠진 것 같아

제주살이 48일차 2022년 9월 17일

게하 도미토리에서 서핑을 하러 제주도 여행을 왔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 그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웃고 싶었다. 서핑을 하면 달라질까? 게하 사장님을 통해 곧바로 서핑 예약을 하였다. 통장에서 7만 원이 빠져나갔다. 반올림하면 10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써도 되나? 고민을 하던 중 게하 사장님이 “요즘 젊은이들은 서핑을 옛날에 자전거 배우듯이 배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 서핑이 뭐 별거야. 그냥 한 번 해보는 거지.



서핑 강습 날, 게하에서 서핑 샵까지 무려 1시간이나 걸어가야 했다. 가장 멀리 사는 사람이 가장 빨리 온다고, 내가 1등으로 도착하였다. 으... 이럴 거면 좀 더 잘 걸 그랬다. 이틀 전 게하에서 새벽 4시까지 논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몸이 천근만근 돌덩이 같았다.


서핑 전용 슈트로 갈아입고 중문색달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바다가 죽고 싶으면 어서 들어오라는 듯 하얀 손을 뻗으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나에겐 피하고 싶은 파도가 누군가에겐 손꼽아 기다려 온 파도였다.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서 서퍼들이 서핑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저 정도는 타야 위험하구나! 이상한 곳에서 안심이 되었다.


모래사장에 앉아 강습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선생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천하장사가 아니라서 나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짧은 이론 강습이 끝나고, 선생님이 쉬는 시간을 주자마자 나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누워 딥-슬립을 하였다.


짧은 단잠으로 기력을 회복한 뒤 해변에서 보드를 펼쳐 놓고 동작 연습을 하였다. 어제 몸풀기용으로 요가를 1시간 꽉 채워서 수련했는데 그 덕에 몸이 조금은 날렵하게 움직였다. 하하 좋았어. 이대로 물속에서 잘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첫 번째 시도. 보드를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선생님이 보드를 들고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왜 수업을 제대로 안 들었냐며 핀잔을 주었다. 바다에 들어가서야 나는 백 번 혼나도 싼 고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강습을 받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파도는 저 너머에서 평행선으로 오는데 물속 길이 왼쪽, 오른쪽으로 쉴 새 없이 바뀌었다. 선생님과 함께 보드를 잡고 파도를 넘었다. 뉴트로지나 모델도 아니고 얼굴에 물 싸다구를 쉴 새 없이 맞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이 오늘 같이 조류가 센 날은 초보자들이 서핑을 배우기 힘들다고 하였다. 반대로 파도가 잔잔한 날에는 일명 서핑 천재(아~나~ 서핑 좀 해야 쓰겄는데?)가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럴 거면 월정리에서 서핑을 배울 걸 그랬나? 하지만 나에겐 후회할 시간이 없었다.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겁을 잠시 집어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STAND-UP!!! 를 외치는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자세를 잡고 일어섰다. 일어섰다...? 와! 일어섰다!!! 고 느끼자마자 파도가 끝이 났다. 파도가 짧은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한 시간 남짓의 자유시간 동안 미친 듯이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 덮치는 파도가 나의 나약함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수능 생활이 끝나자마자 먹고사는 문제를 고심하지 않았던 나의 무지. 대학에 다니면서 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노력하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현실 도피하러 제주도까지 와서는... 뭐 했는데? 브런치 글 썼다고? 요즘 브런치 진입장벽 낮아진 건 알고 있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나의 과거를 날름날름 비꼬고 있었다. 넌 이걸 못 넘을 거야.


난 파도와 전쟁을 했다. 난 아직 다시 일어설 힘이 있고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도 안다. 내가 때때로 쓸데없이 진지해진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나의 타고난 성격이고, 다 날 위해서 내가 꾸며내는 것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무생물인 파도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열심히 파도를 넘고, 넘고, 또 넘었다.


진이 빠지게 물속에 처박히고 넘어졌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괴상한 물질이 마구 나왔다. 내 몸 안에 이렇게 콧물이 많은 줄 몰랐다. 바보처럼 코를 훌쩍였다. 그러나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조금 심하게 파도에 휩쓸려서 물속에서 한 바퀴 나뒹굴었을 때도 나는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강렬한 자극이 내가 아직 건강히 잘 살아있음을 일깨워주었다.


난 결국 혼자서 다시 일어서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역시 초보자가 하루 만에, 그것도 이렇게 파도가 심한 날에 standup을 터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해변으로 돌아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같이 강습받은 사람들이 날 보고 '열정적인 모습이 멋지다.'라고 하였다. 거 참, 오늘은 이상한 곳에서 안심이 되는 날이다.



참, 나는 단 돈 만원이라도 아끼기 위해 슈트를 대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 빼고 모두가 슈트를 빌려서 나도 불안한 마음에 슈트를 빌렸다. 결론적으로는... 아주 잘 빌렸다! 수온이나 해파리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서핑을 하기 전 모래 위에서 강습을 받는데 타 죽을 뻔하였다. 슈트 안 빌렸으면 또 화상 입었겠다.



PUSH~
UP!인데 왜 DOWN을 하니
처참히 실패한 첫 번째 시도
어정쩡한 자세로 성공한 STAND UP
멋진 자세로 타는 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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