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도호도 Oct 12. 2022

50일간의 제주살이를 끝내고

제주살이 51일차 2022년 9월 20일

스텝으로 일하면서 숙소를 내 집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특권을 누려서 일까. 여행하는 6박 7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나는 이제 내 공간이 아닌 곳에서 다른 사람하고 자기 불편해진 몸이 되었다. 제주도 온 첫날에 겪은 빈대 소동도 한몫 한 듯했다.(다행히 그 이후로 빈대는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오늘은 아침 8시 25분 비행기로 제주도를 떠난다. 잠만 잘 거라 이번에도 가성비 좋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그리고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이른 아침 비행기이기도 하지만… 그냥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일찌감치 준비하여 공항에 도착하였다. 짐을 줄이고 줄였지만 스쿠터를 타느라 캐리어를 버렸더니 가방이 2개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하나는 수하물로 맡겼다. 아직도 미니멀리스트 되긴 멀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골아떨어졌다. 이착륙 방송도 듣지 못하고 잔 적은 처음이다. 눈만 감았다 뜨니 김포공항 활주로에 비행기가 도착해있었다.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칸칸이 쌓인 벽돌과 끝없는 경쟁 사회가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오랜만에 보는 높은 건물들과 자동차 소음이 전처럼 싫지만은 않았다. 네모난 세상 속에서 수천, 수백만의 이야기가 뒤엉켜있을 것을 생각하니 재밌어 보이기도 하였다.


쾌적한 공항 로비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시 쾌적하고 널찍한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베드타운답게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먼저 보였다. 전에는 저 건물들이 산도 가리고 하늘도 가리고 나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듯한, 그래서 내가 압사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이 한두 발짝 물러서서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숨 쉬고 살만한 여백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 짐 정리를 하였다. 세탁기와 건조기의 콜라보로 모든 짐 정리가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화장실도 주방도 몇 발자국만 걸으면 되었다. 한마디로 '생활하기 편했다.' 그렇지만 자꾸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 나와 산지가 오래되면 다시 집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에 왔지만 조금 더 쾌적한 게스트하우스에 온 느낌이 컸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12인실 도미토리보단 훨씬 나았다.



남들보다 뒤늦게 온 나의 사춘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내가 평생 담고 살았던 우리 집에 대한, 우리 가족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약간의 애정도 사라졌다. 내가 나의 가족을 대했던 마음이 애증이어서 그랬나 보다. 애정과 증오가 같이 증발해버렸다.


지난 2년 간 정읍, 가평, 수원, 제주도를 떠돌아다니며 내가 모르고 살아온 다른 세상을 많이 구경하였다. 원래는 이다음 스텝으로 호주 워홀을 다녀오고자 했으나... 이 모든 것들이 현실 도피라는 것을 깨닫고 잠시 브레이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내가 고민하는 것들은 당장 해외로 나간다고 해결될 것이 아님을, 나는 이미 뼛속 깊이 토종 한국인이 되어서 내가 사는 곳이 나의 가치관을 크게 바꿀 수 없음을, 나는 지난 2년 간의 떠돌이 생활 끝에 깨닫게 되었다. 한 번쯤 워홀을 꼭 가고 싶었지만 판데믹 기간에 가성비 좋게 국내 워홀을 다녀왔다고 생각하며 만족해야겠다. 훗날 해외에 나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가출 청년이 아닌 온전히 독립적인 사람으로 나가고 싶다.



제주살이 이후 제주도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가평이 아니라 제주도로 취업해서 제주도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내가 제주도에 살고 싶다고 하니 게하 사장님이 애월 쪽에 괜찮은 주택이 2억 8천만 원 매물로 나왔다고 알려주셨다. 대출 끼면 현금은 1억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하하하... 아직 억 소리 나는 금액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난다. 열심히 일 해서 돈 모으면 언젠가는 살 수 있겠지. 그때까지는 현실 도피 그만하고 현생을 갓생으로 살아야겠다.



꽃길을 걸을 수 없을 땐 꽃밭이라도 보면서 걷자.
인간 귤하르방으로 마무리하는 제주살이 일기^_^


이전 21화 제주도에서 떠나보낸 사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