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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에 실천을 포개지 못해 실패한다.

by 황금지기

투자한다는 건 원칙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지만, 투자자는 좀처럼 실천에 실천을 포개지를 못한다. 사소함과 중대함의 경계를 알고 대응해야 하지만, 초가삼간을 태우는 불장난을 투자자는 너무나도 자주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로는 소중한 시간만 꿈으로 희석될 뿐이기에 욕심이 참 욕심스러움을 알고 조금씩 떼어내는 실천의 삶이어야 한다. 원칙을 철석같이 믿고 자꾸만 솟구치는 것들에 반할수록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해진다. 인간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걸 원하지만 시장은 확률의 세계이기에 행하기는 어렵다.




데이트레이딩 투자자는 매일 갈림길에서 선택한다. 선택의 질보다는 하고자 했던 것을 지금 실천하고 있느냐! 이것으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게 된다. 성공하는 사람은 습관이 되도록 초반에 더욱 행동의 양을 늘리는 것에 집중하면서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자신과의 타협도 없이 실천하면서 실천은 복리가 된다. 실패하는 사람은 좀처럼 실천에 실천을 포개지를 못한다. 부러진 목표를 수정하고 세우기를 거듭하다 부정과 나태만이 가득하게 되고, 행동은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막장 드라마처럼 뻔한 결말에서 맴돌게 된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갖게 되는 원리는 이와 같다. 자본시장에서는 상당 부분 운의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되지만, 게임의 본질은 기대수익〈위험이면 (원칙으로 정한 자리가 아니면) 보냄으로써 대비하고, 만일의 위험을 대비하여 손실이면 짧게 자름으로써 대응하는 걸 실천하는 자에게 그 운마저도 유리하게 작용하여 성공한 투자자가 된다. 시장에서 소수가 전체 부의 대부분을 가지게 되는 원리도 이와 같다. 부를 이루는 길을 논함에 있어서도 작은 것을 아껴서 or 가장 중요한 것을 leverage 해서 둘 중 어느 것 하나 틀린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려지는 파동처럼 확률의 명제이기에 둘 다 옳은 방식이며 다만 선택의 문제이고, 결론은 각자의 실천에 따라 각자의 정답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고독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듯이, 투자한다는 건 원칙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았는가! 마음먹기에 따라 삼라만상이 달리 보이고, 생각은 수시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게 사람이다. 진정한 위로를 해 줄 순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듯, 절망의 계곡에서 투자자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가르칠 수는 있으되 전할 수는 없는 법, 자기 마음에 전할 사람도, 마음먹을 사람도 자신뿐이다. 특히 감정이 얽히고설키는 게 일상인 시장에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으며, 투자자 스스로 내면으로 향하는 고독 없이는 성장도 없고 발전도 없게 된다. 시장의 적은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기에 내면으로 향하는 노력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인생, 공부, 투자, 운동 어느 하나도 혼자 고독하게 훈련하는 시간의 극복이 없다면, 넘어짐과 혼란 그리고 정체에 흔들리면서도 고독하게 자신을 알아가는 내면의 극복이 없다면 성취도 없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 이치다. 산다는 건, 투자한다는 건 고독하게 무언가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에게로 걸어가는 여정이다.




“가장 큰 영광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데 있다.”

<소크라테스>

완벽한 건 신뿐이라는 말, 완벽해지려는 시도는 신이 되겠다는 시간의 낭비와 진배없다.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을 만큼의 사소한 실수로 한정할 수 있는 소양이 있다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실수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되면서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지게 된다. 실수를 통해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소양이 쌓인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우면서 성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성장은 실수의 과정이고, 반복은 실수의 인정이다. 확률로 설명되는 시장에서는 운과 실력의 경계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듯이 사소한 실수와 중대한 실수의 경계를 찾기도 대단히 힘들다. 실수가 실력으로 포장되기도 쉽고, 실력이 자꾸만 실수로 비치기도 하는 곳이기에 소양이 깊어져야 그나마 사소함과 중대함을 경계를 스스로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중대함의 경계를 넘지 않는 실수라면 대응하는 투자자에겐 비탈길 위에 불쑥 튀어나온 돌부리에 다리가 걸린 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함과 중대함의 경계를 알아갈수록 대응하는 투자자가 된다.

‘그는 많은 이가 가지 않는 비탈길이기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언제든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수 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훌훌 털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작은 오르막을 오르는 그의 등에서는 여유로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지식을 횡으로 나열하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겠지만, 나열된 지식을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이 종으로 깊이를 더하게 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투자가 어려운 건 횡으로 나열된 지식이나 기법과 같은 어설픈 앎이 수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익률 우상향 곡선의 뿌리를 되는 종으로 깊어지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미천한 자신을 알아가면서 알몸인 채로 시장의 흐름에 전부를 맡길 수 있도록 심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성장하면서 단단해지므로 단단해지는 건 시간이 필요하기에,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에게 성급함이나 욕심은 생존본능이기에, 심리적 불편함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본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본성을 끊임없이 거슬러야 하기에 시장에서 버티기란 절대 쉽지 않다. 주관이 앞선 뇌동이나 추격은 성급함이나 욕심으로 배에 이미 구멍이 난 줄도 모른 채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다. 일상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않았던 초가삼간을 태우는 불장난을 투자자들은 너무나도 자주 한다. 다수는 조금씩 밀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로 대체되면서 군중 속 군중으로 사라진다.




젊은 날의 호기로 정의를 부르짖는 자가, 대의를 내세우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부르짖지도, 내세우지도 않으면서 그냥 침묵하면서, 공감하면서 처음에는 작게 나아짐에 맞추어서 점차 크게 호응하면서 살아감이 진정한 선한 세상을 위한 작은 수레바퀴지 않겠는가? 작은 걸 크게 포장하려, 볼품없는 걸 화려하게 치장하려 들지 말고 침묵 안에서 행함이란 진정한 용기로 삶의 끝으로 나아가길 조용히 소망한다. 그것으로 흐려지는 육신이 아주 가끔이라도 따스한 햇살에 평온하기를 소망한다. 원칙을 지킴이 잔잔하게 이어질 꽃길임을 알지만, 내 안의 일렁임에 부서져 버렸던 세월이었지만, 삶 전체를 뒤흔들 무언가를 소망하며 그리 살다 가기를 해안가를 치는 파도처럼 무한한 세상을 잠시 스쳐 갈 1원짜리 인간은 소망한다. 마음속 옹달샘같이 깊은 곳으로부터 반복되는 외침을 외면하는 생은, (알지 못했다면 그만이겠지만) 알아버린 이가 응답하지 않는 생은 버거울 뿐이다. 욕심이 참 욕심스러움을 알아갈수록 원칙으로 정한 원 안에서의 반복으로 욕심스러움을 조금씩 떼어내는 실천의 삶이길 소망한다.




안경알을 안팎으로 닦아야 하듯이 시장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자신 안에서 이해하는 합이 투자이기에 1+1=1조차도 못한 결과의 연속이다. 지식을 쌓기도 힘들고, 지식에 우쭐대다가 흐려짐을 알아차리기도 힘들고, 경험하지 못한 올바른 경험을 올바르게 인식하기도 힘들고, 의지로, 펜으로만 그려졌든 길을 늘 그래왔던 감정의 네온사인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가기도 힘들고, 부로 가는 사다리가 그렇듯 자본주의에서 그려지는 파동에 생의 대부분을 건 투자자는 늘 힘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곧은 투자자가 힘들게 오른 길 곳곳이 표식이고, 그 표식들이 지그재그로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놓으면서 우상향의 곡선으로 선명해지게 된다. 집착하면 할수록 시간은 집착 따라 흐를 뿐임을, 놓아버릴수록 선명해짐을, 사람도, 현상도, 살아감도 흘러가면 아무것도 아님을, 그렇게 나이 듦이 선명하게 보여줌을 알기를 선인들의 희미한 미소를 알아가게 된다. 아닌 게 빨리 아니어야, 그렇게 인식이 바꿔야 삶은 빨리 아닌 게 아닌 게 된다. 정각을 알리는 시계추는 거듭되다 변화의 정오쯤에서 속삭인다. “당신이 원을 돌 듯이 정한 무언가로 분침이나 시침이 되어 반복하면서 원을 돌다 보면 영원을 알아갈 거예요.” 투자자에겐 외길뿐이다. 늘 위험과 기대수익 사이에서 정함을 선택하고 정함에 책임지면서 그렇게 나아가면서 성장하는 게 투자자의 숙명이다. 원칙이 부러지면 성장하던 나무도 부러지고 엇비슷한 자리에서 정체되면서, 조금씩 모양만 달리하는 나부끼는 맹세의 깃발에 오른손을 올리다 주름만 깊게 팰 뿐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본주의 투자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로는 단지 아무나 꾸는 꿈을 꾸다 소중한 시간만 꿈으로 희석될 뿐이다. 꿈과 현실의 세계는 다르기에 꿈꾸는 자는 다른 이와 달라야 꿈이 현실이 된다. 다르지 않다면 꿈꾸는 것만큼 행동의 관절은 무뎌지게 된다.




“내가 깨어 있다고 일컫는 사람이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가장 내면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열이나 충동 혹은 약점까지도 인식하고 처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헤르만 헤세>

투자는 생각을 놓아버리는 법을, 흐름에 순응하는 법을, 틀렸을 때 욕망을 내려놓는 법을 알아가는,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는 고행을, 고도의 감성노동을 행하는 직업이다. 자기 생각에 이끌리는 건 인지상정, 욕망에 가슴이 달아오르는 건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인 정서이자 감정이겠지만, 그렇기에 생각과 욕망에 반하여 행동한다는 게 지극히 어렵고, 너무나도 어려운 일인 건 상식이겠지만, 투자자는 자신 안으로 솟구치고 자꾸만 메아리치는 생각과 욕망을 잠재우는 것에 바치는 시간만큼 현명해진다. 손실은 외면하고 싶고, 이익을 당장 부여잡고 싶은 게 보통의 마음이다. 돈에 대해서 자꾸만 솟구치는 것들에 반할수록 현명해진다.




투자는 불확실성이란 검은 안개가 짙게 낀 칠흑 같은 밤길을 걷는 것과도 같다. 칠흑 같은 어둠은 ‘너무나 캄캄해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어둠’을 뜻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길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반복과 복기가 만든 철석같은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뜻대로 흘러가 줄 때는 당연히 화사한 꽃길처럼 여겨지겠지만, 승패는 ‘맞추었을 때 어떻게’보다는 ‘틀렸을 때 어떻게’가 전체를 결정하기에 감정의 개입이 짙어질수록 어둠은 칠흑이 된다. 생각해야만 하는 자신의 유혹을 떨치고, 원칙을 지켜야 원칙은 횃불이 되고 비로소 칠흑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칠흑은 똑같은 칠흑이지만, 익숙해진 이에게 칠흑은 칠흑이 아닌 게 되어간다. 불확실성은 만인에게 평등하지만, 불확실성에 익숙해진 이는 나름의 확실성과 희석되면서 칠흑이 아닌 게 되어간다. 아주 깊이 믿음을 준 기법을 등대 삼아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보통의 마음이기에, 어느 정도 단련되어도 파동의 흔들림이 다루기에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예사롭지도 않기에 칠흑 같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확률이란 불확실성과 인간이 좋아하는 확실성 사이의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게 투자자의 몫이다. 원칙을 철석같이 믿고,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가면서 불확실성이란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각자의 확실성을 확률에서 찾아가야 한다. 반복과 복기로 세운 걸 철석같이 믿고 실천하는 것만이 진정한 변화다. 변화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change의 ‘g’를 ‘c’로 바꾸면 chance가 된다. 그렇게 배운 선례대로 변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고, 기회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더 깊이 알게 되고 이러한 변화는 반복함을 의미하기에 반복 속에서 각자의 길을 찾을 확률을 스스로 높이게 된다.




“인간의 정신이란 확고한 것, 형체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게 마련이어서, 학문의 세계에서 정해놓은 기호들에 의지할 수 있기를 원하거든. 인간의 정신은 변해 가는 것보다는 고정되어 있는 것을, 가능성보다는 현실성을 더 좋아하지. 오메가라는 활자가 뱀이나 새로 둔갑하는 것은 참지 못한단 말이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많은 투자자가 실패하는 건 인간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을 원하지만, 시장은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확률의 세계 그 괴리 때문이다. (많은 투자자가 확실성을 원하기에 스스로 그림을 그리면서 뇌동이나 추격하는 건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인간적이었기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만 그럼에도 극복할 것인가! 떠날 것인가! 둘 중 하나의 현재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기에, 원래가 워낙 어려워서 투자 심리나 인간 본성 같은 단어가 수시로 머릿속을 맴돌아야 하는 것이었기에, 결국 보통의 인간의 본성을 반해야만 길이 보이는 인간에게 극복이란 단어를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아무가 알아주는 인정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원칙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찾거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좇아가면 된다. 실패했다 자책도, 후회도 작게 작게 위안거리를 찾으면서 스스로 잊어버릴 수 있으면 훌륭하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단지 우연히 이 세계를 알았다는 것 단지 인생 전반에서 운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분명하게 고정되어 현실성 있는 것을 추구하기에 자꾸만 마음에서 그려지는 파동에 반하여 방향을 정하려 하고, (정함은 마음 안에서 확실성을 부여하면서 편안함을 선사하기에) 정한 방향에 꽂히면서 마음은 시장이 그려내는 파동과의 괴리를 키워가게,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언제나 각자의 마음 즉 투자 심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바로 여기에 방랑 생활의 의미가 있다는 것, 즉 어쩌면 이처럼 식별과 구분의 능력을 갈수록 더 섬세하고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터득하고 단련하기 위해 한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한테로 떠밀려 다닌다는 것을 진작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방랑이 그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마치 상당수 음악가가 한 가지 악기만 다룰 줄 아는 게 아니라 셋, 넷, 혹은 그 이상의 많은 악기를 다루듯이, 완벽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여자들과 사랑을 온갖 방식으로 그리고 수없이 다양하게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무엇에 도움이 되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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