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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극복하는 크기만큼 성장한다.

by 황금지기

투자자에게 자제력은 시작점과도 같은 거대한 강의 발원지이므로 직관을 위해 잃지 않고 버티는 게 목적이면 충분하다. 실천이 더해질수록 글은 깊이를 더해가듯 실천할수록 원칙은 단단해지므로 당연한 불안을 실천에 실천으로 극복해야 한다. 경험할수록 답은 명료해지게 되고, 강점을 반영하게 되면서 지키기도 수월해진다. 감각적으로 직관하고, 이성적으로 통찰하면서 되풀이하다 보면, 반추하면서 반등하다 보면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원칙을 지속 가능하게 지킨다는 건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닿았다는 의미다.




누구나 쉽게 꾸는 꿈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기에 투자의 본질은 어려움으로 귀결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다. 다만 다수가 상식을 무시할 뿐, 누구나 정서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에 무지할 뿐, 실제로 가능한 극복을 쉽게 여길 뿐 시장에서의 상식은 어렵다는 것이고, 이론적 가능과 실제 심리적 가능과의 격차는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아무리 궁리해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생각 너머보다 클 수밖에 없기에 시장에서의 부는 극복한 소수가 거의 전체를 누리는 것이다. 다수는 꿈꾸는 정서적 가능성에만 머물 뿐 좀처럼 실천이란 감정의 극복에 이르지 못한 채 다짐이나 맹세, 내일은 다를 것이라 같은 희망에 의지하다 그 희망의 타성에 젖어버리고 만다. 실전에서 극복의 과정이 치열해도 실패의 확률이 높은 법인데 정서적 극복의 올가미, 내일의 당연한 가능성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치열하다는 건 어렵고 실패의 거듭을 의미하지만, 그 과정을 극복하기 전에는 내일이나 희망과 같은 심리적 막연한 기대는 오늘과 같은 내일을, 투자자가 원칙을 부러뜨리는 것을 밤하늘의 별처럼 날씨에 따라 (시장 흐름에 따라) 적었다가 많았다가, 부분을 지켰다가 전체가 무너졌다가 어차피 가능성 없는 동그라미 안에서 맴돌기를, 희망 고문을 반복하게 한다. 잔뜩 먹구름이 끼어도 낮에도 밝음이 우세한 것처럼, 아무리 어두워도 달이 밝으면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희망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태양이 아무리 비쳐도 감정의 커튼으로 닫아버리면 어둠이 우세한 것처럼,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밤이라 여겨 길을 찾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절망도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감정의 줄다리기, 생이 다할 때까지 팽팽한 희망과 절망의 기 싸움 그게 인생이다. 그사이 희망과 절망의 팽팽함 사이의 작은 차이가, 마음먹기 차이가 투자자 인생 전체를 결정한다. 투자자의 성장은 자기 극복의 크기만큼이다. 잃지 않는 걸 실력이라 여겨도 충분하지만, 투자는 운의 영역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투자자의 실력은 남들과 다른 자제력이고, 그 자제력은 운이 작동하도록 하는, 나빠서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버티면서 거듭되도록 하는, 거듭되면서 누적되도록 하는 투자자에게 있어 시작점과도 같은 거대한 강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작은 손실이나 이익에 연연하는 결국에는 너무나도 작은 것들에 연연하는 본성 때문에, 그 본성의 극복이 어렵기에, 어렵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기에 대부분의 투자는 제자리를 맴돌다가 찬바람이 불면 떠나거나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세네카는 힘주어 강조한다. “화의 포로가 되는 사람은 자유인이라 할 수도 없다.” 짐승은 감정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인간은 감정을 다스리며 사리를 따질 줄 안다. 복받치는 감정대로 휘둘린다면 짐승과 뭐 다를 게 있겠는가. 세네카는 다시 한번 간곡하게 충고한다. “화가 나지 않으면 용감해지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혀야만 활기차게 움직이며, 두려움이 없이는 잠잠해질 줄 모른다면, 마음은 진정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이리저리 나뒹굴 수밖에 없다.…… 미덕이 악덕의 도움에 의지한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치솟는 감정에 휘둘릴수록 내 영혼은 더욱 약해지고 불안해질 뿐이다.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감정을 다독이며 무엇이 정의롭고 올바른 대처인지를 생각할 때, 나의 영혼은 어느덧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처럼 굳건해질 것이다. 세네카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부당한 대접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를 견뎌냈느냐이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




각도가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고,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않고, 걸치지도 않아야 예쁜 그곳처럼 내겐 오래 보아서 예쁜 너도 그렇다. 감각의 핵심 요소인 (감각과 직감의 조화로움인) 직관은 실전을 양분으로 성장한다. 직관을 위해 잃지 않고 버티는 게 목적이 되면 충분하다. 실전을 버티는 시간으로 세공되는 직관은 말 그대로 직접 관람(시장에서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인 실전) 하면서 오래 보아서 얻어지는 재능이다. ‘역사는 기어가지 않는다. 비약한다’라는 말처럼 파동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비약하므로 스스로 자르지 않고 시장에 맡겨야 할 때가 있고, 강한 파동은 도약하지 않고 비약하므로 가지 않고 멈칫거리면 나와주어야 할 때도 있기에 반복하면서 감각을 더해가야 한다. 시장은 짧은 시간의 강한 꼬리 파동이 전체를 좌우하면서 평균 진폭을 채우기에 어려운 것이다. 쌓인 경험으로 어려움을 버티게 해 주는 (복잡함을 단순하게 해 주는) 재능이 직관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면 좁게 볼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고, 보이는 대로 보아야 비로소 넓고 사실대로 볼 수 있기에 인간의 마음은 제대로 보기 위한 극복의 대상이 된다.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건 마음대로 고집을 부리는 일이기에 아집에 휩싸여서는 넓은 세상을, 큰 흐름을, 본질에 다가설 수도, 볼 수도 없다. 결국 투자자가 흐름을 흐름대로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어떠한 정해짐도 없이 손님의 태도로 (객관적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음에 정해짐이 없어야 자세히 볼 수 있는 법, 자세히 볼 수 있어야 크게 볼 수 있는 법이므로 크게 보기 위해서는 마음에 정해짐이 없어야 한다. 정해짐이 없는 마음을 ‘무심(無心) = 텅 빈 마음으로’, ‘무아(無我) = 자신을 잊은 마음’ 이렇게 정의한다면 결국 흐름을,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않을 수 있는 높은 경지의 마음이 무심이고 무아다. 원칙으로 정한 선의 경계에 섰을 때의 당연한 불안을 실천에 실천으로 극복해야 한다. 살아가는 한, 시장에서 꿈꾸는 한 필연의 불안이다. 불안에 맞서면서 한 단계씩 우상향의 계단을 오르는 건 투자자의, 인간의 숙명과도 같다. 기존의, 타고난 원래의 마음을 죽여야 새로운, 투자에 적합한 마음이 수면 위에 드러나고 그 마음에서 새로운 통찰이 생기게 된다.




각각의 에세이에서 우리는 제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 거저 얻는 확신에서 벗어나 진중한 재검토로, 명확한 자기 이해로 옮겨 가려 – 애쓰는 정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개념적 은유는 종이 위에다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사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상황과 이야기 - 비비언 고닉>

시장에서 흐름을 알면 당연히 길은 보이겠지만, 알아도, 길이 보여도 그 길은 여전히 흐릿하기만 할 뿐이다. 흐름을 알고 흐름대로 세운 원칙이란 길을 걸을 때에만 길은 점차 선명해진다. 글쓰기가 종이 위에다 생각을 명확히 밝히려 애쓰는 행위라면 투자는 그려지는 파동에다 생각을 보태려 않으려 애쓰는 행위다. 인간이면 누구나 통제가 필요한 아이 시절이 있듯이 시장이란 낯선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통제가 필요한 아이가 되어야 하지만 이미 익숙한 어른이란 잘못된 인식으로 방황은 시작된다. 익숙해지기 전에는 반드시 통제가 필요한 아이 시절임에도, 그럼에도 스스로 통제해야만 하는 곳이기에 절제가 되지 않는 치명적인 상황에서 골몰하게 된다. 지식과 행동 사이의 기나긴 모순에 갇힌 자아를 맞닥뜨리게 되면서 ‘원칙을 세우는 나’와 ‘제멋대로 감정에 휩쓸리는 나’의 합이 자아임을 알아가게 된다. 실천이 더해질수록 글은 깊이를 더해가듯이, 실천할수록 원칙은 단단함을 더해가게 된다.




모범적인 회고록이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회고록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 (중략) 현대의 회고록은 자신의 삶을 일정한 모양으로 빚은 글이 무관심한 독자들에게 가치 있는 작품으로 다가가려면 극적인 각색을 거치고, ‘되어가는’ 경험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주변의 우연한 사건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들려주는 애매함에서 벗어나, 캐더가 불가침이라 말하는 자기의 충동을 정밀하게 밝혀내는 명료성으로 내적 방향을 트는 것이다.

<상황과 이야기>

자기 극복보다도 더한 자기 자제 (같은 말이지만) 없이는 촛불처럼 의지는 꺼졌다가 밝아짐을 반복할 뿐이다. 중요한 건 어느 순간 아무리 밝아도 꺼짐의 (원칙의 부러짐의) 반복은 끝없는 정체를 의미한다. 형광등처럼 아주 오랫동안 밝은 단계에 이르지 못한 감정은 촛불에 의지하기에 원칙의 불꽃은 자주 꺼지게 되고 당장 밝아도 촛대 길이만큼 뿐이다. 경험하지 않았기에 낯설고 힘이 들겠지만, 마음대로 하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만, 실천이 습관이 되어야만 원칙은 형광등처럼 편안하고 밝은 불빛이 되어 투자자를 이끌게 된다. 실천되어야만 뼈대가 완성되며 올곧은 습관이 거듭되면서 뼈대에 살이 더해지는 법이다. 나아지는 법, 성장하는 법, 부자가 되는 법은 앎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앎이 지혜가 되고, 경험을 통해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더해가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경험할수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명료해지게 된다. 비비언 고닉은 ‘우리는 우리 살가죽 안에 살고 있는 타인, 우리의 이름이 불리면 답하는 그 타인을 잘 알아야 한다.’라고 충고한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정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우월한 존재라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상가와 예술가, 로고스(보편적인 법칙으로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따르는 분별과 절제, 이성적)와 파토스(충동이나 정열을 의미하며 그때그때 주변 환경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받는 기분이나 정서, 감성적), 지와 사랑, 이성과 감성, 머리와 가슴, 정신과 감정, S(Sensing, 현실, 실용, 실천)와 N(iNtuition, 이상, 이론, 예측), T(Thinking, 논리, 사실 판단)와 F(Feeling, 인간관계, 가치 판단) 등 인간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 있다. 투자자는 나르치스로 타고나야 하지만, 다수는 골드문트에 가까워서 감정에 치우쳐 있기에 타고난 진화론적, 성격적 어려움이 투자를 어렵게 하는 커다란 이유다. 결국 에토스(인간이 가지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항상 상반되는 방향을 내포하고 있으나 동일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한 방향을 지향하는 습관으로 단순히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을 통해 향상하는 능력) 즉 스스로 노력을 통해 투자에 적합한 인간인 로고스적으로 변해야 한다. 투자의 결과는 로고스적으로 타고났거나, 에토스적으로 노력했거나 둘 중 하나다. 감정(feeling)과 직감(intuition)에 치우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꿈꾸고 싶은 자의 에토스적 노력이 성과로 제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는 게 첫째고,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음도 제대로 인정하면서 약점을 보완하기보다는 강점을 발굴·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둘째다. 자신의 강점을 반영해야만 쉬워지고 그나마 지키기에 수월하다.




MBTI 성격 테스트에서 S(Sensing)나 T(Thinking) 성향이면 당연히 투자자로서 더 유리한 strong(강한) 한 상태로, F(Feeling) 성향이면 낙제점 F처럼 fragile(부서지기 쉬운) 한 상태라 볼 수 있다. 또한 N(iNtuition)이 의미하는 직관은 순간적으로 직감하는 것으로 개인적 정신 능력이나 판단에 기초하게 되므로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기에 훈련하지 않은 직감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통해 감각이 더해지면 비로소 최고의 인식능력이 된다. 어느 성향이든 체계적인 훈련으로 직감과 감각이 조화를 이루면 직관적으로 되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적 소양으로 이성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면 통찰적으로 된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자 자기 안에서 스스로 변화하는 걸 의미한다. 성장은 곧 변화이고, 변화는 곧 노력이다.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투자자의 자질을 성격상 타고났다면 투자에 좀 더 유리하겠지만, 타고나지 않은 성격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요구하는 만큼 감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야 하고, 이성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 체계적인 훈련은 감각적으로 직관하기 위함이고, 인문학적 소양은 이성적인 통찰을 위함이다.




깊은 사색, 넓은 통찰, 체계적인 훈련, 인문학적 소양으로 올곧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정한 걸 반복한다는 것 자체로 복의 반 즉 운이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니 반등하는 건 당연하다. 매매 과정을 되풀이하며 음미하는 과정 즉 반추하면서 반등하다 보면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투자자로서 인생의 반전을 꿈꾼다면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없는 걸 (원칙을 지키면서 반복하는 자체를 아무나 하지 못한다) 반복해야 한다. 반복 없이는 반전도 없는 법, 원하는 소중한 걸 얻기 위해서 방종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한 칙령, 규칙이 원칙이다. 데이트레이딩에서는 ‘시간과 손실을 짧게 가져감으로써 위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라는 게 위험에 대한 스스로 세운 명제다. 마음이 동하는 건 동하는 대로 하고 싶은 건 누구나 같은 마음이지만, 마음대로 하는 건 자체가 시장에서는 방종이자 원칙을 어기는 최대 위험이다.




감정이 개입할수록 소중한 밑천이 들어있는,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돈을 보관하는 항아리는 밑빠진 독이 된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싫어하는 불확실성을 극복하면서 세운 원칙을 꾸준하게 지켜갈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1% 미만일 것이다. 그저 지키는 것 자체로도 소수가 되고, 지킴의 과정이 무언가 대단한 걸 잉태할 것임을 알기에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이 가슴에서 자꾸만 솟아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범인의 범주가 아니기에 시장의 부가 1%에 집중되는 것 당연하고,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정착하는 이도 극소수이므로 가능성의 고원은 깨끗하고 여유로운 극복한 자의 낙원이다. 낙원으로의 안내자로 세워지는 원칙은 자신이 가장 잘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할수록 지킬 여지는 커지게 된다. 원칙을 지속 가능하게 지킨다는 건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닿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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