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란 손을 놓은 채 오롯이 원칙을 지켰느냐? 그것뿐이다. 한시도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자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을 자주 만나는 건 당연한 일, 행복은 예측할 때 멀어지고, 순응할 때 가까이서 보듬어 준다. 계획은 현상과 최선의 양념으로 버무려야 한다. 싸게 사야 하는 건 여유로운 마음을 위함이다. 심리가 무너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게 투자의 본질이다. 적은 돈으로 큰돈을 이기겠다는 탐욕 자체가 ’지는 사람‘의 가장 나쁜 습관이다.
투자를 잘하려면 역설적으로 투자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얽매일수록 실타래가 꼬이는 법이다. 집착할수록 사고팔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투자자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고자 하는 판단을 멈추고, 흐르는 강물처럼 주야장천(晝夜長川) 즉 밤낮으로 쉬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파동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시비를 가리고자 얽매여서는 흘러갈 수 없는 법이다. 더 큰 이익, 더 빠른 만회의 거센 유혹을 뿌리치고 세운 골대, 정한 자리 거기서 멈추는 것이 결국 가장 현명한 결정이 된다. 멈추고 내려놓아야, 꽉 쥔 주먹을 펴고 매달린 손을 놓아야 흘러갈 수 있다. 중요한 건 감정이란 손을 놓은 채 오롯이 원칙을 지켰느냐? 그것뿐이다. 지켜지는 원칙에 만족하는 마음이 거듭되다 보면 편안한 마음이 된다. 편안한 마음이 투자하는 마음의 토대이자 뿌리가 되는 여유로운 마음이다. 왜 여유로워야 하는가? 그래야만 짧게 자를 수도, 길게 가져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싸게 사기 위한 기다림이, 그 여지가 비싸게 팔 수 있는 기다림을 잉태한다. 기다림이 기다림을, 기다림이 돈을 잉태하면서 흘러가는 게 시장의 파동이다.
제 의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믿지는 않게 되었지요. 그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힘든 시절조차 영원히 지속하진 않지요. 그것이 부처님이 준 두 번째 선물입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관심을 거둬들이고 선택한 곳으로 주의를 쏠리게 하는 것, 진정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준 세 번째 선물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 살면서 이보다 더 도움이 됐던 말은 별로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타고난 초능력을 간과한 채로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지식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자랑한다. 지혜는 자신이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하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매달리면, 어떤 경험이나 배움도 우리에게 스며들 수 없게 되어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더 높은 지혜에 도달하고 싶다면, 신념과 확신을 살짝 내려놓고 우리가 실은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합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 모른다는 점을 알면,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는 일이 좀체 없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론상 여유로울 것으로 여겼지만 바쁘거나 꽉 짜여 빡빡한 줄 여겼어도 중간에 여유가 많을 때가 자주 있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가, 할 수 있다는 의지와는 다른 현상이 너무나도 빈번하다. 계획은 최상의 시나리오일 뿐 과정에서 현상과 최선의 양념으로 버무려야 한다. 알고 있는 게 얼마나 협소한지도, 모르고 있는 게 엄청나게 광활한지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게 각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황, 잘 나가고 있을 때는 실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지피(知彼) 즉 지각하는 지식이 힘을 발하는 시기다. 고장이 빈번해지면서, 설비의 조화로움(균형)이 무너지면서 실력이 자주 드러나듯 좋지 않을 때 실력은 선명해진다. 지기(知己) 즉 감각으로 얻은 것들이 지혜가 드러나는 시기다. 테마나 종목이 아닌 지수, 주가의 위치, 큰 흐름을 보는 심리를 파헤치는 이유다.
큰 흐름을 보아야 한다는 건 크게 보면 파동은 등락한다는 것을, 오르면 떨어질 확률이, 내리면 오를 확률이 훨씬 확률적인 곳이 시장의 흐름을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볼수록 여유로워진다. 어찌 되었든 싸게 사야 하는 건 여유로운 마음을 위함이다. 감정이 앞설수록, 결과에 치중할수록 그렇게 성급할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등락할 뿐인 파동의 등락은 보이지 않게 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마음으로 본다는 건 크게, 숲을 본다는 의미다. 사람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취약하여 진행되고 나서야 확연하게 보이게 된다. 그때쯤 하수의 눈에, 군중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숲에 커다란 직사각형을 그리지 못한 채 눈앞에 서 있는 나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함몰되는 하수의 전형이다. 마음의 눈으로 파동을 그리다 보면 파동의 마디가 비로소 보이게 된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자리에서 눈에 확연하거나 투자하는 마음도 감정에 이끌려 동한다면 여전히 하수다.
아잔 자야사로 스님은 유창한 태국어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갈등이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자. 다를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습니다……. 우리의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틉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틀릴 수도 있다는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 지식이라면, 지혜는 그 마음에서 움트게 된다. 계속해서 상승이 나오면 하방 압력이 커지는 게 파동의 상식이지만, (자연의 자연스러운 이치이지만) 보통의 감정은 하락에 대비하지 못한 채 분위기에 취하고 만다. ‘휩쓸리는 군중’ 중의 한 명이 언제든지 자신일 수 있다는 걸 감정의 때가 계속해서 낀다는 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관점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감정 파괴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틀릴 수도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라는 주문이 절실하다. 한시도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자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작가는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예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라면서 예측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투자자를 설득한다. 또한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뤄집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자연의 속성입니다‘라고 변동성에 직면할, 불확실성에 순응할 용기를 내라고,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내라고 투자자를 또다시 설득한다. 사람에게 행복은 비교할 때 멀어지고, 공감할 때 가까이서 만족감을 준다. 투자자에게 행복은 예측할 때 멀어지고, 순응할 때 가까이서 보듬어 준다. 꿰맞추려 무리하지 않고 균형을, 주변환경과의 무게 중심을,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게 확률을 다루는 현명한 투자자다.
정상적인 상황은 고만고만하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은 제각각이다. 정상적인 흐름에서는 실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맞닥뜨리면 수영장의 물이 빠졌을 때 누가 벌거벗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워런 버핏의 말처럼, 위기가 왔을 때 실력의 민낯이 드러나게 된다.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거나, 그려지던 파동에 안개가 자욱하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확실성에 더해지는 불안을 이겨내고 원칙으로 돌아가는 내면의 힘이 실력이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가는 힘은 점차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된다. 횃불을 들고 가지 않았던 길을 더듬어 비탈길을 올라가면 된다.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을 자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네들 그거 아는가? 우리 정신은 어떤 면에서 이 칼과 흡사하다네. 내가 이 칼을 아무 때나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나? 플라스틱도 자르고 콘크리트도 자르고 유리, 금속, 나무, 돌까지 마구 자른다고 상상해 보게. 날이 금세 무뎌져서 제 역할을 할 수 없겠지. 반면에 나무를 자를 때 외엔 칼집에 꽂아두고 쉬게 하면, 이 칼은 제 역할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그 비유는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저의 정신을 온전하고 바르게 유지하려면, 날카롭고 효과적으로 발휘하려면, 대로 쉬게 놔둬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나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투자 심리가 바로 칼과 같다. 여기저기 아무 자리에서나 칼을 뽑아서는 안 되는 양날의 검이다. 가격은 심리의 합이고, 각자의 심리에 따라 성급함과 여유로움이, 수익과 손실이 갈리는 곳이, 매 순간 심리가 심하게 부딪치면서 등락하는 곳이 시장이다. 기법, 기술, 지식 등으로 문제점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마음대로 될 것 같지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심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원칙 자리 외에는 칼집에 꽂아두어야 심리가 무너지지 않는다. 칼집에 꽂을 때마다 심리는 단단해진다.
보통 도박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무조건 지겠다’라는 얘기나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도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30년 동안 도를 닦은 노승에게 천하절색의 미녀를 발가벗겨서 방에 들여보내면 그 노승이 일 년 내내 외면하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가장 힘든 싸움이 자기와의 싸움이다. 종국에 자기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박은 자기와의 싸움은 아니다. 물론 견뎌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지혜와 인내와 기술과 무엇보다도 자신을 ‘이기는 사람’으로 만드는 많은 습관에 달려 있다.
<카지노 시크릿 – 진킴>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혹시 100만 원을 가지고 만원을 이길 수 있으십니까?”라고 비결을 알려 준다. 시간을 쪼개면서 그 시간을 견디어 내는 힘이 비결임을, 시간을 버텨내는 인내가 지혜이고, 그 기술이, 그 습관이 ‘이기는 사람’으로 만드는 비결임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투자자가 자꾸만 확률이 낮아짐에도 고집을 꺾지 못하는 건 원칙을 지키려는 심리보다 우연을 기대하는 심리가 여전히 투자하는 마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투자는 기본적으로 단기적인 흐름을 맞추는 게임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흐름을 어떻게 따르느냐 하는 게임인데도 말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싸움의 의미는 시간을 버텨낸다는 것이며 그렇게 버텨낼 수 있는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이 이기는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게 투자의 본질이다.
진정한 바카라의 승자가 되려면 적은 돈으로 많은 돈을 따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적은 돈으로 많은 돈을 따려 한다. 아마 바카라란 으레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성공 법칙은 항상 확률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실패의 위험이 적어진다……, 적은 돈으로 큰돈을 이기려고 하는 것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저급한 욕심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손자병법은 말한다. 나의 강한 군사로 적의 약한 군사를 이기라고 말이다.
<카지노 시크릿>
보통 감각적으로 변화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마음은 계속 휩쓸리고, 상당히 급해지기 마련이기에 변하는 흐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므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면 이기려는 헛된 시도만 되풀이할 뿐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았던 큰 흐름도 서두를수록 보는 시야가 좁아져 흐려지게 되어 있다. 적은 돈으로 큰돈을 이기겠다는 탐욕 자체가 ‘지는 사람’의 가장 나쁜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