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는 한꺼번에 많이 버는 자가 아니라 지속해서 적게 잃는 자가 마침내 이루게 된다. 근거 있는 매매는 긍정의 근거지다. 아마추어는 그럴싸한 계획에 의지하지만, 프로는 그려지는 현상에 의지한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주관의 소음이 들리고, 멀리 볼수록 주관의 다그침을 거부하는 힘도 강해진다. 지루한 반복은 지식이 지혜로 화학 반응하는 시간이다. 대비하면서 대응하기 위해 예기치 않은 상황을 예측하는 게 예측의 역할이다. 예측의 영역이 작아질수록 대응하겠다는 마음은 현상으로 시야를 확장한다.
마음은 소유욕만큼 불안한 법이다. 양방향 게임, 선물이 인생 선물이 되기 위한 답은 각자의 심리에 이미 담겨 있다. 시장에서는 한꺼번에 많이 버는 자가 아니라 지속해서 적게 잃는 자가 마침내 이루게 되는 법이다. 마침내는 시간을 이해한 자에게 주어지는 단어다. 투자자를 자꾸만 불안하게 만드는 시장의 필연적 특성, 두 가지는 시장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다. 다수가 얻는 정보가 늘어날수록, 똑똑해질수록 예측은 빨라진다. 자본주의가 진보할수록 변동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투자자가 불안정할수록, 불안할수록 불확실성을 스스로 증가시키게 된다. 자꾸만 커지는 변동성과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소유욕을 스스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소유욕이 불안을 자극할수록 혼란스러워지고 그렇게 증가하는 불확실성은 임계점을 향한다. 그렇게 되면 원칙보다는 기대에 의존하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불안정하면 투기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게 또한 사람의 마음이다.
김성근 감독은 「인생은 순간이다」에서 ‘돈 받으면 프로’라고 했다. 투자에서는 돈 벌어야 프로다. 프로는 오직 계좌로 말할 뿐이다. 계좌에 돈을 넣으면 반드시 돈 버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 아마추어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고(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프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걸 하는 사람이다. 프로는 오랜 경험으로 해야만 하는 걸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사람이다. 원칙은 프로의 손길로 다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핵 주먹 타이슨의 말이다. 누구나 원칙을 앞세우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기만 하면 흔들림에 처맞으면서 원칙은 급격하게 꼬이게 된다. ‘다듬어져 다져지고 다짐을 다잡기 전의 나는 시장에 처맞기 전에는 늘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다. 매번 그럴싸함은 한방에 그럴싸했을 뿐임이 증명되었다.’ 아마추어는 그럴싸할 계획에 의지하지만, 프로는 그려지는 현상에 의지한다. “모든 물체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 상태를 유지하거나 일정한 속도로 직선 운동을 계속한다.” 관성의 법칙으로 불리는 뉴턴의 제1운동 법칙이다. 물체에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면, 본성에는 내부의 힘이 필요하다. 내부의 힘은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 꾸준함이다. 꾸준하게 이어지는 관성이 프로를 만든다. 꾸준하게 부딪치면 변화의 수가 많아지게 된다.
데이터는 참고할 만한 것이고 믿을만한 숫자이지만 어디까지나 어제까지의 원칙이지 오늘의 원칙은 아니라는 게 야구의 생리다. 그래서 야구에 완벽함은 없는 것이다. 내가 60년을 넘게 야구를 해도 여전히 야구가 어려운 이유다. 야구에는 끝이 없다. 확률의 다툼이고, 그 확률은 매 순간 달라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다.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하고’하는 대처 능력이 갖춰져 있는 사람이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근거는 틀림없이 게임의 승률을 높일 수 있다. (중략) 나는 아직도 야구가 참 어렵다. 그래도 근거를 찾으면 괜찮다. 거기서 반드시 ’다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생은 순간이다>
위기를 만나면 자르고 다음 타석을 기다리면 된다. 파동은 등락하므로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 앞으로도 쭉 위기는 거듭되겠지만, 자르면 거듭해서 기회는 온다. 근거 있게 지나온 과거는 성장의 뿌리다. 근거 있는 매매는 경험하지 못한 긍정의 근거지가 된다. 복리다. 느려도 상관없다. 시간을 이해하면 멀리 갈 수 있다. 뿌리가 깊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 상수는 시간을 고독하게 여행했기에 고요하지만, 하수는 불안과 확신이 버무려지는 과정이기에 시끄럽기 마련이다.
거북이는 위기를 만나면 가만히 서서 고민한다. 머리도, 손도, 발도 몸 안으로 깊숙이 넣고 멈춰 선 채 자기 안에서 답을 찾는다. 고민하면서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운다. 거북이가 길을 멈춰 기다리는 것은 무조건 참기 위함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함이다. 거북이는 몸속으로 머리도 팔도 다리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다가 자기가 갈 곳을 찾아간다. 끝끝내 살길을 찾아낸다. 그러고선 한 발 한 발 그저 앞으로만 묵묵히 걸어간다. 걸음을 내딛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운다. 그래서 거북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의도, 인내, 아이디어 그 모든 것이 남는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프로세스를 찾아가는 것이다…, 시간만큼은 인간이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한순간도 쉴 수 없었다. 시간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오늘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무심코 보낸 하루가 나중에 엄청나게 큰 시련이 된다.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긴다. 그것이 야구가 내게 가르쳐준 인생이다.
<인생은 순간이다>
기회는 대개 싼 곳에 있고, 싸게 사지 않고서는 여지가 너무 비좁다. 투자자가 사야 할 때는 비싸게 팔 수 있을 때뿐이다. 손실을 빠르게, 짧게 잘라야 하는 이유는 손실 폭만큼 비싸게 팔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추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파동은 등락하기 때문이다. 등락하기에 등락하는 파동과 함께 등락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나도 취약하다. 감정 너머로 볼 수 있어야 그나마 다소 성급하더라도 성급함에 만취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세계로서의 자신을 이해해야만 마음의 눈으로 감정 너머를 보게 된다. 지금 수를 계산하는 ‘생각하는 나(지식)’가 아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나(지혜)’가 바라보는 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주관의 소음이 들린다. 소음을 들을 줄 알아야 객관의 신호가 보인다. 주관을 소음으로 인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말을 아끼게 되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 타인을 경청하는 건 독서와도 같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흐름에 순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는 야구를 모른다. 그러니 다시 태어나도 야구할 수밖에 없다. 이번 생에 찾지 못한 답은 다음 생에 찾아야 하니까. 물론 그 생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있을 것이다. 뭐든 하면 할수록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평생 해온 야구지만 아직도 잘 모른다. 60여 년 동안 야구를 하면서 이것만큼은 잘 알게 되었다. 야구에는 정답도 끝도 없다. 그저 공부하면 계속 배워나갈 뿐이다.’
김성근 감독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발견한다. 모름지기 사람의 삶은 이래야만 한다. 팔십이 넘은 노감독의 삶이라는 타석에서 평생 지켜온 철학에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각진 돌멩이들은 산골짜기 속 물을 따라 바다까지 흘러 내려간다. 거센 물살을 타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내려온다. 부딪히는 속에서 연마되고, 어떤 데서는 스톱 되고, 고생하고, 고통을 겪고,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아 흘러가고 또 흘러간다. 결국 세월이 흘러 바다에 가까워질 때는 요만한 돌멩이가 되고 마침내 모래가 된다. 그게 인생이다.‘
목표가 불분명하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지만, 가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에 열정을 쏟는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쌓여가게 된다. 비옥한 토대가 되고, 시간을 먹고 뿌리가 단단해지면 대나무가 그러하듯 어느 순간 성장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 법이다. 열정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특히 투자자와 돈은 시절 인연, 견디면서 시간을 쌓아가는 자가 만나는 인연이다. 긴 시간을 전제한 욕심을 꿈이라 하고, 짧은 시간을 전제한 욕심은 탐욕이라 불러도 마땅할 듯하다.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인간 본성이기에 누구나 짧은 시간을 탐하지만, 긴 시간을 기약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본성 넘어 의지의 영역이다. 멀리 보면 take보다는 give 쪽에 치우치려 되므로 흐름에 순응적이지만, 짧게 보면 take에 집착하게 되므로 감정이 앞장서기 마련이다. 멀리 볼수록 주관의 다그침을 거부하는 힘도 강해진다. 그 힘은 멀리 보고자 하는 의지의 내적 투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거듭되는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부감의 승리, 감정이 흔들리는 날들을 헤아리기도 힘들 것이다. 머물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듭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실천적 서사가 필요하다. 서사는 글에 꽃이 피게 하고, 글에서 향기가 나게 하는 건 서사다. 여기서 서사는 깨달음의 실천하는 각자의 이야기다. ‘항상 내가 틀리고, 네가 맞아‘라고 시장을 향해 끊임없이 독백했다. 이 산을 넘기가, 깨달음의 서사를 쓰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실력이란 산을 스스로 넘어야 행운을 알아보는 혜안이 생긴다. 지식은 견(見), 단순한 시선에 불과하지만, 지혜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 즉 혜안이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걸 보는 혜안 없이 성공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건 지루한 반복을 고독으로 승화한다는 것 즉 각자의 가슴 속 열망 그것을 위해 견뎌낸다는 것이다. 지루한 반복은 마음속에서 지식이 지혜로 화학반응 하는 시간이다.
극단값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은 곧 역사의 진행 방향을 예견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의미한다……, 오류가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예측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검은 백조 현상은 예측 불가능성이 특징이므로 우리는 (순진하게도 그것을 예측한다고 노력하기보다) 그 미지의 가능성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편이 옳다……, 최대한 집적거리라. 그리하여 검은 백조가 출몰할 기회를 최대한 늘리라.
<블랙스완 – 나심 탈레브>
생존은 기회에 대한 무한 노출을 의미한다. 첫째도, 둘째도 생존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시장에서 생존은 예측이 아니라, 대응에 달려 있다. 예측할수록 시야가 좁아져 예측하지 못한 것들로부터 타격을 입을 확률도 높아지게 된다. 예측의 영역이 작아질수록 대응의 영역은 넓어진다. 대응하겠다는 마음은 현상으로 시야를 확장한다.
나는 내가 시장가격을 예측하는 데 완전히 무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인데,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또 자신들이 거대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대부분 거래자는 “달려오는 증기기관차 앞에서 동전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올 희귀한 사건 앞에 자신을 노출한 채 까맣게 모르고 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블랙스완>
변동성 위험은 매매 시간과 자금 배분을 통해 완화할 수 있고, 불확실성 위험은 아닐 때 최악의 시나리오로 줄일 수 있다. 무지를 깨닫는 건 위험을 깨닫는 것이다. 예측에서 대응으로 무게추가 넘어가도록 도와준다. 투자자의 무지는 예측이 불가능성의 영역에 있다는 걸 애매하게 아는 것이다. 무지해서 예측하고, 무지해서 그것에 얽매이는 시도가 뇌동이다. 올바른 투자는 예측의 영역이 아닌 현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예측이 어긋났을 때를 대비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대비하면서 대응하기 위해 예기치 않은 상황을 예측하는 게 예측의 역할이다. 인간 본성이 오류투성이임을, 그 무지를 알아야 예측에 의존하여 철로에서 동전을 줍다가 잠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