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실에서 멈추지 않고 신념을 개입할수록 도박이 된다. 성과에 집착할수록 곤란해질 뿐이다. 무지하기에 무모한 것이고, 무지에 대한 착각으로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 인간은 쉽게 배우지 못할뿐더러 자기 생각에 쉽게 갇히고, 실천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세상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우연히 지혜로워질 수는 없다. 늘어난 지식은 오만과 혼동 사이에서 방황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심리의 합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건 지혜가 빚은 마음의 눈, 알 수 없었던 것들을 가린 커튼을 열어젖히는 게 실천이다.
멈추면 비로소 참다운 게 보인다. 욕심에 가려진 흐름은 멈추지 않으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손실에서 멈추는 건 뒷걸음질이 아니라 도움닫기다. 삼키지 못하고 말이 많다는 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건 모른다는 것이다. 멈춰서서 제대로 사색하고 배우지 않은 채 모르는 것에 억지가 더해지니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행동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이 명확할수록 (바둑의 정석처럼) 상수다. 말이 많다는 건 이기심 속 주관이 강하다는 것, 참을 줄 모른다는 것, 여전히 흐름 너머에서 혼자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타심 속 경청은 객관이 자리 잡아 간다는 것, 흐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연습이다. 현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투자자의 길이다. 대화를 성공으로 이끄는 강력한 도구가 침묵이듯 투자자가 주관을 내려놓은 강력한 도구 역시 침묵이다. 흐름과의 동행은 투자자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인생도, 투자도 좋은 습관이 좋은 결과를 만든다. 흐름에 맡기는 게 결국 옳다.
체스 고수들은 실제로 자기 수의 약점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하수들은 자신의 수를 부정하는 사례들보다 긍정하는 사례들을 찾는다. (중략) 조지 소로스는 투자할 때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최초의 가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확신이며, 구태여 자신의 에고를 북돋는 신호를 찾으려는 욕구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다.
<블랙스완>
아닌 것에, 틀릴 가능성에 집중하는 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정이기에 그 자체로 옳다. 좋은 것들만 보려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본성, 투자에서는 독이 되는 평범한 마음에서 벗어나려는 꾸준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투자는 신념을 개입할수록 도박이 된다. 투자를 도박으로 만드는 건 인간의 본성, 그 너머에서 잠자코 현상을 바라보는 자신과 만나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직관은 비선형적인 일은 잘 포착하지 못한다…, 게다가 우리는 두 개의 변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할 때 한쪽의 값이 일정하게 입력될 때 다른 쪽의 결과는 항상 같은 값을 산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우리의 감정은 우리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블랙스완>
시장은 꼬박꼬박, 즉시 결과물을 받을 수 없는 곳 즉 노력과 성과 혹은 시간과 성과가 같지 않은 곳이다. 투자하는 마음은 그럼에도 과정에 치중하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가는 마음이다. 일상의 세계와 다르기에 성과에 집착할수록 곤란해질 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지극히 선형적이지만, 투자는 너무나도 비선형적이다. 인간은 본성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것을 선호하지만, 투자는 정의하기 복잡한 모호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자꾸만 기대가 파동을 확정해 버리는 근거다.
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고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의미하는,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도리에 맞아야 한다는 중(中)과 평상적이고 불변한다는 용(庸)이 합쳐진 중용(中庸)의 마음이 지혜다. ‘좋았다가, 나빴다가’을 반복하면서 등락할 뿐인 시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순응하는 중도적 태도가 투자자의 지혜다. 세상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우연히 지혜로워질 수는 없다. 우연의 거듭일지라도 우연 사이에서 자주 빛나는 행운을 보기 위해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투자자는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 하고 그 돌봄 중 으뜸이 인문학적 소양이다. 독서는 선인들의 선례로 마음의 때를 씻으면서 때를 기다리는 마음을 지속해서 이어가도록 이끌어 준다.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투자는 확률의 세계이지만, 불행히도 진화는 확률을 잘 다루지 못하도록 이루어졌다. 모른다는 걸 깨달을수록 예측의 토대, 생각의 위험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다. 인정할수록 예측은 줄어들게 되고, 설령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예측일지라도 의존도가 낮아지게 된다. 인정하는 만큼 선택의 질은 좋아지게 되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만큼 집중의 질도 좋아지게 된다. 결국 미지의 영역에서 선택하고 집중하기 위해서는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일상에서의 침묵은 무지를 앎에 대한 예의다. 침묵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무지를 안다는 의미다. 무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공부다.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무지하다는 걸 알아야 비로소 위험이 선명해진다. 무지하기에 무모한 것이고, 무지에 대한 착각으로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만 빼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들여다볼 때 ‘땅굴 파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미래에 통상적인 것은 없음에도 미래를 통상적인 것, 검은 백조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미래는 플라톤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중략) 많은 사람에게 지식이란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 확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의 원천이다. 여기서도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상자 속의 것’을 열어 보지 않고도 예견하는 플라톤적 사고, 즉 (사리에 맞지 않는) 법칙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블랙스완>
작가는 우리는 결코 예견할 수 없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땅굴 파기’를 멈추는 일이며, 확률에서 우리 인간이 천박한 존재임을 명심하고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더 잘 이해해 보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시야는 생각으로 인해 협소하며, 편향으로 인해 예측하길 좋아한다. 예측이 꽂히게 되면서 숲이 아닌 보고자 하는 몇 그루 나무에 그려놓은 동그라미에 자주 꽂히게 된다. 투자가 절대 쉽지 않은 건 인간이 쉽게 배우지 못할뿐더러, 자기 생각에 갇히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측할수록 우연의 산물들을 부정하면서 현상과 동떨어지게 된다. 우연의 산물들인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뒹굴면서 영그는 게 실력이다. 행운은 준비된(실력이 갖춰진) 자들이 알아차리는 것, 현상에 따르는 것 자체가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돈이 개입되고 커질수록, 여유롭지 못할수록 편협해지면서 시야는 협소해진다. 돈은 투자의 명확한 목적이자 없어서는 안 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목적인 돈보다 원칙이란 과정이 앞서기 어렵다. 시야가 협소하면 작은 것에 성급할 수밖에 없다. 멀리 볼수록 여유로운 법, 크게 볼수록 덤덤해지는 법이다. 천천히 가야 멀리 가고, 크게 보아야 또박또박 가는 법이다. 멀리 보기 위한 훈련이고, 크게 보기 위한 소양이다. 돈 앞에 서면 시야는 좁아지고 눈이 멀게 마련, 쉽게 맞을 때 가끔 쉬울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 절대 쉽지 않다. 잘할 수는 있겠지만, 다 잘할 수는 없다. 가끔이라도 쉬울 때 낮출 줄 안다면 대부분 자리에서 배울 수 있다. 낮추는 마음이 이타심이다. 이타심은 흐름에 순응하는 마음의 바탕이다. 바탕에 알록달록 이기심으로 가득하면 흐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시장은 언제나 변하기에, 좋고 나쁨을 반복하기에 결국 나쁜 이기심은 아주 나빠졌을 때 파멸에 가속도를 붙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언제 좋을지, 어떻게 나빠질지, 어디에서 다시 좋아질지 알 수 없다. 나빴을 때 이타심은 빛을 발한다. 나빴을 때 살아남으면, (잃지 않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좋아졌을 때 좋은 걸 얻는 건 상식, ‘좋았다. 나빴다‘의 반복, 등락할 수밖에 없는 게 세상사 파동의 이치다.
생각하는 나 너머 바라보는 나,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성급하게 행동하는, 욕심이 잔뜩 낀 안개 너머의 바라보는 나, 그 내면의 목소리가 가장 정확한 길잡이다. 고독하게 무소가 되지 못하는 건 내면의 길잡이와 어긋나게 살아가도록 진화된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군중이 가지 않는 길, 갈 수 없는 길가에서 바라보는 나 그가 기다리고 있다. 바라보는 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성급함과 욕심 너머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가격을 결정하는 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므로, 투자자는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무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보이는 것의 한계가 명확한 이유다. 보이지 않는 걸 보는 눈이 지혜가 빚은 도자기, 마음의 눈이다.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손은 심리의 합에 가깝고, 인간의 심리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바’를 과시하며 오만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분명히 적지 않은 것을 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을 뿌리 깊이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자주 일어난다. 인간의 오만은 어느 집에서든 거실 한 곳에서 드러난다. 둘째, 이러한 오만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자주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일까? 더 지독하고 흥미로운 질문도 나온다. 왜 우리는 지난 시기 동안의 예측 결과 기록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예측이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할까?
<블랙스완>
투자는 무언가를 배우게 하므로 지식은 증가하겠지만, 지식에 확신이 더해질수록 지식은 감정에 그대로 노출된다. 투자로 늘어난 지식은 오만과 혼동 사이에서 방황한다. 작가의 표현처럼 방황했다는 사실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오만이 지식을 과대평가할수록 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는 오류에 지속해서 노출된다. 실제로 아는 것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차이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차이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정보를 더 많이 접한 사람들은 더 많은 가설을 생성하기 때문에 그 효과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만큼 느려진다. 불필요한 요소를 더 많이 볼 뿐 아니라, 그것도 정보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매우 경직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번 이론을 만들어 내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어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히려 자기 이론을 만드는 일에 늦는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믿음 고수, 즉 한번 형성된 견해를 뒤집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도 일종의 소유물처럼 여기기 때문에 한번 형성된 생각과 이별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정보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참여자들은 처음 내린 결정을 더 확신해 갔다. 정보가 오히려 해가 된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나는 ‘더 많을수록 더 좋다“는 속설과 싸워 왔다. “가끔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블랙스완>
정보들이 연결되면서 정제되기 이전에는 쓸모가 적고 늘어날수록 편향을 자극할 뿐이다. 채우고, 비우는 숱한 정제 과정 없이 생각 버리기가 참으로 힘든 게 인간이다. 늘어나는 지식이나 형성된 견해를 지혜로 정제되기 전에는 혼돈의 씨앗을 거듭해서 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직접 실천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알 수 없었던 것들을 가린 커튼을 열어젖히는 게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