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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고 있는 것들

by 서린

물건이 소중해졌다.



예전의 나는 사물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나이가 들수록 접하는 대상이 많아졌다. 하지만 갯수가 증가함에 따라 개별적인 것들과의 깊이는 얕아졌다.


대체되는 것이 많아졌다. 더 저렴하고 편리한 것들이 쏟아진다.


만남도 그렇다. 한 사람과의 깊이 있게 이어지는 경험은 줄고 단편적이고 인스턴트한 순간들이 그램단위의 가벼운 무게로 SNS에서 흘러간다. 스크롤 속에서 쏟아지는 정보는 흘러가고 하나의 주제에 머물러 사유할 시간은 줄어간다.



지금 우리 집 식탁에는 아이들의 연필꽂이가 있다. 그 안에는 셀 필요가 없을 만큼 많은 연필과 색연필이 꽂혀있다. 색깔도, 무늬도, 모양도 가물가물하다. 집 안에 그런 연필꽂이가 아이들 방에도 하나가 더 있다.


필통에 필기구를 몇 자루 밖에 들고 다니지 않았던 학창 시절, 하나하나의 펜은 내게 의미 있었고 귀중했다. 고등학교 때는 1년 넘게 한 브랜드의 사색 볼펜을 쓰며 펜심을 갈아 끼워가면서 썼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그 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험 잘 보게 도와달라 소망을 빌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아꼈던 펜의 브랜드도 기억난다. 겔리롤과 플레이칼러 펜을 문방구에서 하나씩 사서 모아가며 엄청 소중하게 아꼈었다. 그 펜들로 다이어리를 꾸밀 때는 또 얼마나 기뻤던지... 플레이칼라 새것을 쓸 때의 느낌과 오래된 것이 종이에 닿는 감촉이 달랐다. 그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펜을 요리조리 굴려가며 한참이나 오래도록 들여다보곤 했었다.


연필을 깎아 쓰던 시절, 엄마가 깎아주던 연필은 늘 근사했다. 그 모양을 따라 하고자 얼마나 부단히 연필을 깎았던가. 뾰족하고 고른 연필을 만들며 엄청난 몰입감을 느꼈었다. 그 장면들이 눈에 생생하다. 최근 10년간 연필을 깎아본 기억은 없지만 내 손은 지금도 고스란히 그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 한 번 칼로 연필 깎아봐야지…


예전의 나는 물건들과 교감했다. 몇 가지 소중한 사물과 추억을 나누었고, 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갔다.

나이를 먹어 연필과 펜, 색연필을 쉽게 살 수 있게 되자 그 의미는 사라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쓰고, 펜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각각의 것들은 잠깐의 관심만 받고 금세 잊힌다.



사람들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너무나도 쉽게 서로 연결되고 닿지만 그 안에 깊이를 잃어간다. 영혼이 교류되기도 전에 그냥 그렇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많다. 잠깐의 반짝임이 우리를 어쩌면 더 외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너무 많아지고 편리해진 세상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를 어쩌면 넓이를 얻는 대신, 깊이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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