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60,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열 한번째 글
예순이 되고 나서야 ‘비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젊을 때의 나는 채우는 데 익숙했다. 책상 위에는 늘 서류와 노트북, 보고서가 쌓여 있었고, 머릿속엔 해야 할 일과 계획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하루라도 멈추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에, 시간을 채우고 또 채웠다. 그러나 그렇게 채워진 하루 끝에는 늘 묘한 허기가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채움만으로는 충만할 수 없다는 걸.
컨설턴트로 일하며 25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수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안이 점점 비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일은 늘 있었지만, 마음은 메말라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비워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엔 낯설었다. 일을 멈춘다는 건 곧 나 자신이 멈추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조금씩 공간을 비워보니, 오히려 그 안에 여유와 생각이 들어왔다.
내가 비우기 시작한 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관계를 정리하고, 억지로 맞추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내려놓았다. 보고서의 완벽함보다 내 안의 평온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나둘 내려놓을수록 새로운 것들이 들어왔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 새로운 글감들이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비우면 잃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더 많이 얻었다.
AI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내 경험이 무너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과거의 방식을 조금 비우고 새로운 도구를 받아들이자, 일의 효율이 달라지고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AI는 내 일을 빼앗은 게 아니라, 내 시간과 여백을 돌려주었다. 그 여백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나를 채워갈 수 있었다.
비움은 단순히 버림이 아니다. 채우기 위해 먼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책상 위를 정리하면 마음이 정리되고, 일정에서 불필요한 일을 줄이면 하루가 더 깊어진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속 불필요한 욕심을 덜어낼수록, 진짜 중요한 것들이 보인다.
나는 요즘 하루에 한 번은 일부러 ‘멍’해지는 시간을 만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바라보거나 커피 향을 느낀다. 처음엔 낭비 같았지만, 그 시간이 쌓이자 생각이 정리되고 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억지로 끌어냈던 아이디어들이 이제는 여백 속에서 스스로 떠오른다.
예순의 지금, 내 삶은 비움과 채움의 균형 위에 서 있다.
이제는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내 마음의 공간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를 생각한다. 비워야 들어올 수 있고, 멈춰야 다시 걸을 수 있다. 그 단순한 이치를 이해하는 데 반평생이 걸렸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전반부는 ‘채움의 시간’이었다.
지식을, 사람을, 경험을 채우느라 쉼 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비움의 시간’이다. 내 안의 소음과 불필요한 욕심을 덜어내며, 남은 삶을 조금 더 가볍고 투명하게 살고 싶다.
비우는 건 결국 나를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 감사, 그리고 여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비워야 채워진다.
그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마음 깊이 받아들인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