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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09. 2022

45세 L차장, 대기업 퇴사를 결심한 세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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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백이다. 

머리색이 갈색 브라운에서 흰머리가 반이 됐다. 그래서 반백이다.

76년생 X세대로 쉰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반백이다.

글을 쓰고 책도 냈고 간간히 강연도 하지만 사실상 백수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반백이다.


16년간의 직장인 시절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쫑내고 약 4년의 시간동안 스스로 고립된 채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는 중년 궤적에 대한 이야기다. 돈이 아니라 글을 펑펑 쓰는 반백의 하루. 그 속으로...




막 45세가 되었던 2월의 어느 금요일 나는 퇴사를 했다. 자의이기도 하고 타의이기도 했지만 예정에 없었던 갑작스러운 퇴사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얼마되지 않는 개인물품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 나오다 문득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봤다. 내 젊은날을 함께 했던 곳. 한때의 선배, 동료, 후배들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자신의 업무로 분주했다. 불금을 앞둔 오후의 사무실은 옅은 생동감마저 느껴졌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늦겨울 찬 공기를 맡으며 고개를 올려다보니 오후 4시경의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듯 어둑어둑했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나는 47세가 되었다. 동갑의 와이프와 내년이면 고1이 되는 아들도 있다. 퇴사 후 열흘만에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었는데, 벌써 졸업을 앞두고 있다니 시간 참 싶다. 퇴직금과 위로금으로 먹고 살고 있지만 잔고는 바닥이 나고 있다.


다니던 회사는 S그룹 소속이었다. 비록 매출이나 영향력 면에서 마이너한 관계사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손꼽히는 대기업 로고가 박힌 뱃지와 사원증, 명함은  타인에게 나를 설명해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구성원의 '행복'을 내세우는 그룹이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 나 자신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행복을 회사에서 찾는 이는 드물었다. 그렇게 16년을 버텼다. 


오너와 경영진의 삽질로 10년 가까이 적자를 면치 못하자, 회사는 사람 자르는 일에 열중했다. 대기업 이름표를 달고 있다는 것은 그런점에서 놀라웠다. 언제 망해도 무리가 없을 회사가 돌아는 가고 있으니 말이다. 모기업에서 매년 내리 꽂히는 낙하산 임원들은 '비용, 인력효율화'라는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하필 조직문화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그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들이 시키는대로 구성원을 '괴롭히는'일에는 동참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고성이 오가고 얼굴을 붉힌채 회의실을 박차고 나오는 일이 잦았다. 2019년 겨울, 인력담당임원의 눈밖에 난 조직문화팀은 해체되고 그 팀을 맡고 있떤 나는 커리어와 거리가 먼 마케팅 팀으로 발령이 났다. 


사무실을 옮겨 자리를 배정 받은 첫날, 멀뚱히 자리에 앉아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참고 견디면 희망이 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배운다는 자세로 버텨보자. 마음을 다져보기도 했다. 첫 번째 일은 상품 판매를 위한 홈쇼핑 업체 미팅이었다. 사원급 후배직원과 참석한 미팅자리에서 대화의 70%를 못 알아들었다. 눈치 빨ㄴ 업체 직원은 나를 외면하고 사원급 후배직원과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고생하셨어요. 처음이라 생소하실거예요."

후배직원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낯이 후끈 달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은 관계사의 마케팅 제휴일이었다. 풍선 인형을 설치하는 일을 위해 부지를 홀로 돌아보는데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웬일이지 그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내 뇌리에 꽂혔다. 그리고 마침내 현타가 왔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자리에 돌아와 멍하게 앉아 퇴직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혔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그러던 중 희망퇴직 신청 공지가 떴다. 만 50세 이상. 위로금으로 몇개월치 월급을 준다는 조건도 붙었다. 퇴직금으로 버틸 생각을 했던 차에 눈이 번쩍 뜨이는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가만, 자격기준이 만 50세 이상이라니. 


"어 김과장 좀 볼수 있을까?"


고민끝에 한때 함께 근무했던 인사팀 후배를 불렀다.  희망퇴직 자격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명단에서 빼달라는 이야기가 아닌, 넣어달라는 부탁이라니. 총경력 15년 이상이라면 심사에서 고려해보겠다는 김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이거, 축하드린다고 해야할지..."

"고마워 신경써줘서. 진심이야."


희망퇴직 명단에 선정 됐고 일주일 이내로 퇴직일이 결정됐다. 급한감이 없지 않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미쳤느냐 라고 했다. 이직이 결정되거나 넥스트가 준비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는 질책을 닮은 걱정의 눈초리가 이어졌다.


대부분은 참고 다닌다고 했다. 일에 대한 명분? 모욕? 대우? 그런 배부른 고민 말고 눈앞에 닥친 현실을 보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택했다. 아니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평소 상사들과 충돌이 잦았는데, 그 일을 계기로 동료와 후배들에게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정치에는 관심도 없었다. 일을 재미있게 하는 건 몰라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윗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한번 그 말을 뱉기 시작한 이상,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 해야하니까 하는 일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운좋게 사람 관련 일만을 16년 해온 과정이 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그 일이 하고 싶었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스토리텔러가 되기로 했다. 조직과 사람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나는 이곳에서 지쳤다. 더 나를 잃다간 다시는 나를 찾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광대가 되는 모멸감은 내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자극했다. 내 몸과 마음을 회복해 다가올 인생 후반전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되기로 했다.


45세, 예비고1 아들이 있는 중년의 남자는 그렇게 잘(?)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했다.


약 3년이 훌쩍 지난 이 시점. 그 결정을 후회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후회한다고 말할 것이다. 왜 조금 더 일찍 결심을 하고 시간을 축적하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 말이다. 그리고 확신한다. 누구나 쉽게 내리지 못했을 이 결정이 나를 새로운 동력으로 이끌어 누구나 닿지 못할 가능성의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마라토너 이봉주는 이렇게 말했다. "분기점을 돌면서 남는 힘으로 가겠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완주를 못한다." 라고.


백세 시대, 내 인생 역시 반환점을 돈 셈이다. 글을 쓰겠다는 인생 후반전의 동력은 내 마음을 뜨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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