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윤설은 휴대폰을 쥔 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나의 마지막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전 이젠 이제 다 내려놓으려고요.
눈을 비비며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읽음 숫자는 그대로였다.
“혹시…”
윤설은 떨리는 손끝으로 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냉정한 안내음뿐.
그날 오전, TV 뉴스 하단에 자막이 흘렀다.
윤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끝이 얼어붙은 듯 차가워졌다. 곧바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윤설: “혹시… 한나 씨랑 연락되는 사람 있어요?”
잠시 후, 다혜와 수연이 동시에 나타났다.
다혜: “저도 전화했는데 안 받아요.”
수연: “프로필 사진이 없어졌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셋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면엔 “…” 입력 표시만 깜빡이다 사라졌다.
셋은 단톡방에서 오랫동안 침묵했다.
다혜가 먼저 글을 남겼다.
다혜: “다 제 탓이에요… 제가 괜히 그때 몰아붙여서…”
수연: “아니에요. 다혜 씨 탓 아니에요. 근데… 저 너무 불안해요. 솔직히 우리… 무슨 모임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더 힘들어지는 거 같아요.”
윤설: “수연 씨, 지금은 다 같이 한나 씨 걱정해야 할 때 아닌가요?”
잠시 후, 수연의 말이 차갑게 날아왔다.
수연: “저는… 더 못 하겠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화면 위로 작은 알림이 떴다.
윤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을 거예요, 다혜 씨. 우리 너무 겁먹지 말아요. 별일 아닐 수도 있잖아요.”
다혜는 흐느끼며 겨우 대답했다.
“…네. 그냥… 별일 아니면 좋겠어요.”
통화를 끊고 난 윤설은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인터넷 카페 알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윤설이 가입해 둔 식이장애 온라인 카페.
새로운 게시글.
제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식이장애 모임 후기〉
윤설의 손끝이 덜컥 떨렸다.
그리고 무심코 눌러본 순간, 화면 속에 보이는 첫 줄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젯밤 모임에 나갔던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였어요.
처음엔 기대했어요. 다들 아픔을 나눈다기에, 조금은 이해받을 수 있겠지 했죠.
그런데 모임 분위기는 생각보다 너무 억압적이었습니다.
저한테 약 끊으라고 강요하고, 이런저런 병원 얘기만 늘어놓고…
제가 듣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날 억지로 고치려 드는 사람들의 훈계가 아니라,
‘날씬해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마음조차 잘못됐다고 말하는 모임이라면, 제겐 필요 없어요.
그래서 전 제 방식대로 가보려 합니다.
진짜 뼈말라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관심 있는 분들은 제게 연락 주세요.
윤설은 화면에 굳어버렸다.
아이디를 보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한나였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잠시 숨이 트였지만,
곧바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메시지를 남기고,
사람들을 밤새 불안과 죄책감 속에 몰아넣더니…
이젠 세상을 조롱하듯 저런 글을 남기다니.
윤설은 이성을 잃은 듯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윤설 (댓글):
윤설의 댓글이 올라가자마자, 몇 분 뒤 한나가 다시 달았다.
한나:
“걱정은 고맙지만, 전 이미 제 길을 선택했어요. 살 빼고 싶다는 제 마음이 왜 죄여야 하죠?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숨이 막히는 거예요.”
윤설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받아쳤다.
윤설:
“살고 싶지 않다는 건 자유가 아니라 자해예요! 그걸 모임으로 포장하고 사람까지 끌어들이겠다고요? 위험한 짓 멈추세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한나: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다 똑같아요. 저 같은 사람 이해하는 척하다가 결국 통제하려 들잖아요.”
윤설:
“이해요? 이해?! 당신이 원하는 건 공범이지, 이해가 아니에요!!”
카페 회원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윤설에게 “말이 너무 심하다”라며 반박했고, 어떤 이는 “한나님 말도 위험하다”라고 했다.
분위기는 금세 싸움터가 되었다.
결국, 관리자 계정의 공지가 떴다.
화면 위로 ‘카페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뜨자, 윤설은 휴대폰을 던질 뻔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은 단 1초, 그다음은 분노뿐이었다.
그날 저녁, 윤설은 다혜를 불러 술집에 앉았다.
맥주잔을 부딪치며 두 사람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결국 윤설이 먼저 터뜨렸다.
“살아있긴 하대. 근데 그 지랄 같은 글 봤어? 뼈말라 모임 만들겠다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죽게 만들려고 작정했어.”
다혜는 눈시울을 붉히며 잔을 비웠다.
“내가 그때 조금만 참았으면… 이런 일 없었을지도 몰라. 미안해, 언니.”
“다혜 탓 아니야. 그 인간이… 그냥 우리 다 이용한 거야.”
두 사람은 술잔을 계속 채우며 쌓였던 분노와 죄책감을 토해냈다.
한나에 대한 공포와 분노, 그리고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아이러니한 안도감이 뒤섞여, 술자리는 눈물과 웃음이 엉켜 버렸다.
술집 밖, 새벽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윤설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살아있는 게 다행일까… 아니면 차라리 죽은 게 나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