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임신했어.
해인의 목소리는 떨렸고, 손끝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준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더니, 미소가 어렸다. 그 짧은 미소를 본 순간 해인의 가슴도 따뜻해졌다. 그래, 아기가 우리를 바꿔줄 거야. 남준도 달라질 수 있어.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남준의 입가가 다시 차갑게 굳더니, 무심하게 뱉어냈다.
임신이 뭐 벼슬인 줄 알아? 그까짓 임신.. 몸 좀 불편하다고 다 봐줘야 돼?
순간 해인의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그 말은 돌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숨이 막히고 눈물이 차올라 결국 해인은 차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엎드려 울어버렸다.
눈물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내가 왜 이토록 후회하는 마음을 갖게 된 걸까. 아기야, 미안해. 너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책감이 파도처럼 몰려와 해인을 휩쓸었다.
며칠 뒤 또다시 언쟁이 붙었다. 끝없는 잔소리에 지쳐 해인은 집을 나왔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얼음이 녹아드는 아이스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멍하니 거리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오갔지만, 해인의 마음은 얼어붙어 있었다.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배 속의 아이가 떠올랐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끼니는 거르면 안 돼. 해인은 억지로 발걸음을 옮겨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따뜻한 치킨 수프가 목으로 넘어가자 그제야 조금 숨이 트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순간 남준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덮쳤다.
해인은 참아왔던 말을 터뜨렸다.
“나 임신 상태야. 끼니도 거르면 안 되고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남준은 콧방귀를 뀌며 더 큰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집안일까지 손 놓고 살면 안 되지. 몸 좀 불편하다고 모든 걸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마.”
그 말은 곧 족쇄가 되어 해인의 어깨를 옥죄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압박감이 밀려왔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지만 남준은 모른 척했다. 아이가 있어도 이 사람은 변하지 않겠구나. 그 깨달음이 차갑게 스며들었다.
어느 날, 해인은 갑작스러운 복통에 휘청였다. 피가 비치며 하혈이 시작됐다. 온몸이 떨리고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해인은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안 돼… 가지 마… 제발…”
그러나 아이는 그렇게 떠나갔다.
해인은 온몸으로 울부짖었다. 혹시 내가 임신을 후회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아기가 알아버린 걸까? 그래서 떠난 걸까? 가슴을 찢는 자책이 끝도 없이 몰려왔다.
남준에게도 울분을 토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냉정했다.
“네가 몸 관리 못해서 그런 거지. 나 탓하지 마.”
해인은 무너졌다.
며칠 동안 해인은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렸다.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고, 세상은 색을 잃은 듯 희뿌옇게만 보였다. 남준은 처음 이틀 정도 밥을 차려주고 집안일을 도왔다. 그 짧은 순간 해인은 희미하게나마 착각했다. 혹시 이제라도 변하는 걸까?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남준은 다시 무표정하게 말했다.
해인은 황망하게 눈을 크게 떴다.
“… 뭐라고?”
남준은 태연하게 덧붙였다.
돈 벌어야지.
그 말은 얼음장 같은 손이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소름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