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전문가를 찾아가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약 한 달이 지났다.
계속되는 다이어트 강박증에 윤설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다. 우울증과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윤설은 결국 큰 마음을 먹고 상담실 문을 열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놓인 소파, 은은한 나무 향,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전문가의 차분한 눈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저는…” 윤설은 손을 꼭 쥔 채 겨우 입을 열었다. “가끔은 너무 많이 먹고, 또 며칠은 아예 굶어버려요. 세끼를 꼬박 챙겨 먹으라는 말이… 솔직히 무섭습니다. 살이 불어날까 봐요.”
전문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두려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해요. 하루 세끼를 규칙적으로 먹는 게 오히려 몸을 안정시키고 체중을 정상화시킵니다. 갑자기 불어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윤설 씨, 한 번 믿고 시작해 봅시다.”
그 말은 얼어붙어 있던 윤설의 마음에 작은 불씨처럼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 윤설은 매일 아침 식단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따끈한 된장국에 밥 한 공기, 점심에는 직장 근처 한정식집에서 정갈한 반찬 몇 가지, 저녁에는 죽 한 그릇. 그렇게 하루를 기록하다 보면,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참지 못하고 편의점에서 빵과 과자를 사들고 와 허겁지겁 먹어치운 날도 있었다. 거울 앞에 서면 자책감이 몰려왔다.
“또 이래버렸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지만 상담 날, 전문가의 말은 달랐다.
“잘하고 계세요.”
윤설은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저 폭식도 했는데요.”
“괜찮습니다. 넘어졌다고 실패가 아닙니다. 다시 기록하고, 다시 시작하면 돼요. 그게 회복의 과정이죠.”
순간 윤설의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흔들림이 ‘실패’가 아니라는 말에, 그녀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상담실을 나설 수 있었다.
변화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윤설은 퇴근 후 동네 산책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주말엔 작은 독서모임에도 참석했다. 바람을 맞으며 함께 걷는 소리, 책을 읽고 웃으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오래 묻혀 있던 고립감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그중에서도 자꾸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범준.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윤설의 마음을 건드렸다.
“저도 같은 부분에서 울컥했어요. 작가가 우리 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더라고요.”
윤설은 순간 놀라 그를 바라봤다. 범준도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맞췄다. 묘한 울림이 가슴속에 번졌다.
모임이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범준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윤설 씨, 오늘 이야기 정말 공감 많이 했습니다. 혹시… 연락처 물어봐도 될까요?”
윤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떨림이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곧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말없이 그녀는 자신의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날 이후 둘은 책 이야기를 시작으로 음악, 영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까지 나누게 되었다. 메신저 알림이 울릴 때마다 윤설의 가슴은 조용히 두근거렸다.
윤설은 범준과 주고받는 메시지가 점점 기다려졌다. 처음엔 책에 관한 대화뿐이었는데, 이제는 하루의 날씨, 회사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 퇴근 후에 먹은 저녁 메뉴까지 자연스럽게 오갔다.
메신저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윤설은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런 설렘을 다시 느낄 줄이야…’
어느 날 저녁, 범준이 불쑥 물었다.
“윤설 씨,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세요?”
“주말이요? 네… 뭐 특별한 일정은 없는데요.”
“좋아요. 근처에 새로 생긴 전시회가 있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순간, 윤설은 망설였다. ‘나 같은 사람이… 누군가와 데이트 같은 걸 해도 될까?’ 그러나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기대감이 망설임을 눌렀다.
“…네, 좋아요.”
주말, 전시장 앞.
범준은 캐주얼한 차림이었지만 깔끔했고, 무엇보다 그의 표정엔 편안한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오셨어요? 혹시 못 찾으실까 봐 조금 일찍 와 있었어요.”
윤설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준다는 사실이 오래된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 안에서 둘은 나란히 작품을 감상했다. 범준은 그림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며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고, 윤설은 그 옆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 그림… 어쩐지 윤설 씨랑 닮았네요.”
“저랑요?”
“네. 겉으론 잔잔해 보여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잖아요.”
그 말에 윤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을 이렇게 표현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전시회를 다 둘러본 뒤, 범준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혹시 배고프지 않으세요? 제가 자주 가는 고깃집이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윤설은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설렘이 여전히 가슴속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작은 골목에 자리한 고깃집 안은 이미 고소한 연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낡은 선풍기가 덜컥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범준이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여기 삼겹살 진짜 맛있어요. 사장님이 직접 고기를 손질하시거든요.”
잠시 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에서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다. 윤설은 그 향기에 본능적으로 침이 고였다.
“한 잔 하실래요?”
범준이 소주병을 들어 올리며 묻자, 윤설은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투명한 액체가 잔에 채워지고, 두 사람은 살짝 잔을 부딪쳤다.
“오늘, 저랑 같이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범준의 말에 윤설은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랜 시간 아무도 자신을 ‘같이 있어 고맙다’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저도 즐거웠어요.”
그의 눈빛은 따뜻했고, 그 따뜻함은 윤설의 오랜 공허함을 채우는 듯했다. 고기와 소주, 그리고 대화가 이어지며 그녀의 긴장은 조금씩 풀려갔다.
그러나 두 번째 잔을 비우던 순간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거친 웃음소리,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 지글거리는 고기 냄새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왔다.
순간, 윤설의 머릿속에 오래된 장면이 스쳐갔다.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윤기가,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던 그 밤.
그 말이 날 선 칼날처럼 다시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누가 널 좋아하겠어? 넌 또 버림받을 거야
윤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