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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 J Aug 23. 2022

감 7화음을 그대로 두면 안 되겠습니까?

선생의 기록 5 - 2018년의 JY

음악에 대해 싫은 소리라도 경험하고 싶은 순수함으로 가득했던 학생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순수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모든 대화의 어미는 ‘다나까’체로 바뀌어 있었다.

이 아이의 인사는 다른 학생들보다 약 2초 정도 길다. 일단 가던 걸음을 멈춘 후, ‘안녕하십니까’와 동시에 허리를 숙이는 느긋한 동작, 미소 띤 얼굴이 3단 콤보 한 세트를 이룬다. 태어나 먹은 끼니 수 보다도 더 많이 듣고 쓰는 말이지만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에서 진정성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아이는 정말 상대가 안녕한지를 챙기고 있는 인사를 한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 복도를 전력 질주하다가도 이 아이의 인사에는 웬만하면 나도 급브레이크로 멈춰 서서 ‘너도 안녕하니’ 응답한 후 질주를 재개하곤 했다.



어느 날, 학기 말 상담 중 요즘 특별히 어려운 과목은 없는지를 물었었다.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화성학. 어렵다기보다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화성학 선생님께서는 감 7화음은 그 뒤에 반드시 해결 화음이 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왜 해결이 꼭 되어야 되는지 모르겠는 겁니다. 감 7화음은 그냥 듣고만 있어도 너무 좋은데 그냥 그대로 두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 순간 내 학생 중 이런 말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는 걸 할머니가 되어서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감 7화음을 그냥 두고 싶은 학생의 고민이, 나에게는 박카스로 세수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도록 청량했다.


나는 대학시절 화성학 수업에서 네 학기 모두 A를 받았던 듯하다. 그러니 아마도 감 7화음을 해결해 내는 것쯤은 거의 자동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이 내 삶에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하느라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이나 맥락에 대해서는 별 궁금한 것이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감 7화음이 연속될 때의 아름다움은 어쩌라고?" 같은 생각을 화성학 수업을 들으며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을 알아보고 집착할 만한 음악에 대한 진심은 훨씬 뒤 얼마만큼의 고통을 치른 후 자라났다. 그러나 이 아이는 스스로 진심이라는 옷을 이미 입고 있다.


교과상담 후 진로상담으로 가야 할 길이 감 7화음 이후 완전히 경로를 이탈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누었다.

네가 가진 마음을 ‘진심이라고 한다. 진심이 언제나 통하는 세상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너는 적어도 너의 진가를  알길 바란다.

이 아이는 아마 내가 한 말을 그 순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미 잊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학생이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악보를 보는 것부터 버거웠던 학생이 음악에 대한 진정성 하나로 더디지만 분명하게 성장해가던 4년을 지켜본 것은  그대로 행운이었다.  아이 덕분에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이 가끔 기억이라도 났다. 팔이  움직일 정도로 연습하여 당당하게 A+ 거머쥐었던  아이의 졸업연주를 보며, 이런 귀한 학생을 가져봤음이  인생에도 값진 재산으로 남을 것임을 확신했다.

졸업 연주를 마치고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없는 말주변의 최대치를 발휘하느라 애를 쓴다. 어떻게든 문자나 편지로 써보고 싶었지만, 너무 감사한 마음에 할 말이 찾아지지 않아 일단 무작정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고 답해주었다. 나도 내가 너의 선생인 것이 너무 감사해서 무어라 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어 가는지 드문드문 지켜볼 것이다. 해결하고 싶지 않은 감 7화음에 담았던 진심,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반복하는 '안녕하십니까'에조차 담은 진심을 누군가가 크게 건져내어 귀하게 쓰기를, 마음 다해 소망하며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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