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음악의 역할, 죽지 않을 권리를 전할 의무
새로 자리 잡은 학교는 꽤 규모가 크다. 나는 패컬티와 학생, 5개나 있는 합창단들의 연주들 중 많은 부분이 나를 필요로 하는 포지션에 있다.
첫 출근을 한 날은 이미 이 학교가 개강 3주째를 맞는 시점이었고, 내가 맡은 한 합창단에서는 매우 심도 있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 준비 중이었다.
Craig Hella Johnson의 “Considering Matthew Shepard/매튜 쉐퍼드를 기리며”
악보를 전해 받고 작품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1998년, 와이오밍 대학 정치학과 학생이었던 매튜 쉐퍼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는 심한 구타와 학대를 당한 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펜스에 묶여졌다. 10시간 이상 방치된 끝에 발견되었지만, 수술 닷새 후 죽음에 이른다.
이 사건은 미디어에서 크게 다뤄지며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사건 10년이 지난 후에야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관련 법안이 정착되었다 한다.
“Considering Matthew Shepard”는 이 사건에 기반한 수난곡의 성격을 띤 작품이다.
한 시간이 훌쩍 넘는 플레잉타임 동안 여러 장르와 여러 기법을 넘나든다.
바하의 평균율 1번으로 오프닝을 연 후, 고전주의, 가스펠, 포크뮤직, 일렉트릭, 미니멀리즘 등 수많은 장르와 기법을 아우른다. 합창단이 입을 꾹 다물고 피아니스트와 내레이터만으로 작품을 진행시키는 부분도 꽤 많아서, 나도 집중의 시간이 좀 필요하다.
콰이어 디렉터는 처음부터 ‘나는 콰이어 디렉터요, 그러므로 적어도 그에 걸맞은 친절함을 장착하였소’라는 전형적인 친절함과 약간의 허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풋 하고 웃음이 나는 정도, 밉지는 않은 그런 허세.
그는 내가 수업에 참여한 첫날,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원했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본인과 나의 생각이 일치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합창단과 지휘자, 피아니스트, 객원 연주자들 모두 이 작품을 그저 공연하는 곡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교감과 공유의 매개체로 바라보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 뒤에 덧붙인 말이 흥미로웠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작곡가가 Considering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았어요. 학생들 중에는 동성애자라는 대상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고, 이 학생들에게 지휘자 개인인 나의 시각과 생각을 주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매튜는 다른 걸 모두 떠나서 목숨을 함부로 잃지 않을 권리는 있었다는 것, 그 정의는 이 음악을 통해 전해졌으면 해요. 합창단원들에게뿐 아니라, 우리 공연을 찾을 관객들에게도 말이에요. 작곡가가 이 작품에 이렇게까지 많은 기법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출근 첫날이었다.
무너져 가는 아파트와, 여기까지 왔는데 또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되는 난감함이 피부를 뚫고 장기 어딘가를 찌를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건 몹시 잘못된 결정이었나 보다, 넋 놓고 괴로운 와중 그와 나눈 이 대화는 적어도 그날 어치의 난감함을 모두 잊게 했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서 조차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그의 허세 따위도 역시 속으로 조금 피식거려주기는 했으나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한가롭게 음악 할 때인가 라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고, 학과평가를 위하여 전문성과 진실성을 내던지고 어떻게든 교과 축소를 해야만 했고, 축소된 교과 안에서 어떻게든 교육의 질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게 하려고 이 과목 저 과목을 연계할 방법을 매 순간 찾아야 했던 지난 몇 년, 그렇게 애를 써도 학생들에게도 학교에게도 내 마음이 그다지 닿는 것 같지 않아 외롭고 괴로웠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 다른 환경 좋은 음대 교수들보다도 오히려 치열하게 생각했던 ‘음악의 역할’ 그리고 ‘대학 음악교육의 역할’
이 지휘자는 음악의 역할에 대해 한마디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본인의 자리에서 본능적으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나에게 작품에 대한 그의 애정을 얼굴이 벌개질 때까지 이야기 하는 순수함을 보며,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는 불변의 기본 값이 ‘음악의 역할’을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의 무의식에 작용하고 있는 것임이 전해져 왔다. 만난 지 두 시간 만에 받은 인상이라 강한 확신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이런 나의 짐작이 만약 틀렸다면 굉장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적어도 그가 제 할 일을 할 수 없게 주저 앉히는 대학 시스템으로부터의 방해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속한 조직에서 이해받고 있다. 부러웠다.
음악은 실용적인 분야가 아니다. 실용이 아닌 다른 것에 기여한다. 이는 약점이 아니다. 이 분야의 성격이다.
극단적으로, 순수예술을 하며 그 예술하는 행위로부터 돈이 벌리는 예술가도 극히 드물다.
나같은 음악대학 교수도 예술가로 분류되지만, 예술의 행위로부터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가르치는 행위로부터 돈을 번다.
순수예술에서의 음악은 사람 마음을 보다 깊숙이 건드릴 수 있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마음을 두드리고 어루만지다가, 결국은 경이로운 절대적 아름다움 앞에 나를 세워놓고 내 존재의 한없이 작음을 자각하게 한다. 그 아름다움은 희노애락의 극한을 포함하며, 세상 속된 것이 줄 수 없고, 말로 잘 표현될 수 없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한다. 예술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어떤 층위에서든 그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예술가의 할 일이다. 그 경험치가 쌓인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일, 그런 것을 아예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일은 분명 다를 것이다. 예술적 소양이 어떤 한 사람의 부분으로 안착되면, 그것이 그 사람이 지닌 다른 이성적 소양들과 맞물려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개인의 인생에 큰 결정을 할 때,
속해 있는 조직을 위해 무언가를 논의할 때,
나라를 위해 중차대한 선거를 할 때,
윗 세대를 향해 직언할 때,
다음 세대를 위해 조언할 때,
이럴 때 말이다.
한 개인들이 무엇을 결정할 때 그들의 예술적 사고가 미미한 영향력이라도 가져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덜 흉한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예술은 시절 좋을 때만 향유하는 잉여의 것일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술의 역할이 단순히 고단한 세상에 대한 위로에 그친다고만 볼 수가 없다.
‘돈을 벌지 못함, 세상 실용과 실효에 쓸데가 없음’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구축해 놓은 시스템 안에서 온갖 멸시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도 돈 벌 수 있다, 우리도 최첨단 시대에 대한 자각이 있다, 우리도 시대에 발맞출 수 있다, 봐라 AI랑 같이 연주도 한다’, 나는 기반없이 성급한 이런 방향으로의 항변이 항상 걱정스럽다. 음악으로 돈을 벌고, 시대에 발맞추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지만, 이것이 본질의 파악 없이 논의 되면 위험한 범주의 것이된다.
이 지휘자와 거의 4-50분 긴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이 사람도 나처럼 텍사스에서 공부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걸 알아가다 보니 늦둥이 막내 동생뻘의 나이라는 것도 짐작으로 알게 되었다. 학생들 앞에서 주워 챙기는 카리스마가 어쩐지 내 눈에 뭔가 어색하다 했다. 어린 사람이다.
그러나 허세가 좀 있으면 어떤가?
본질을 알고 진심을 장착한 상태에서의 젊은 허세는, 금괴 가득한 금고를 언제라도 열 수 있는 열쇠 끝자락에 달린 장식 같은 것이리라 이해해본다. 그 불필요한 장식이 있든 없든, 금고는 열리게 되어 있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을 정도의 스킬은 이미 나에게도 장착이 되어있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의 진심을 파악했고 마땅히 존중한다.
Dr. S! 당신 공연의 의미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나도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다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