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머리부터"일까에 대한 웃픈 해석
부산 출장 일정이 잡혔다. 금요일 새벽 서울발 KTX를 예매하면서, 가는 김에 거래처에 들르려 전화하니 해거름에나 시간이 된단다. 때마침 주말이라 맛난 거 먹으며 놀다 올까 하며 찾아본 일기예보는, 일요일까지 세찬 비바람이 반겨줄 거란다. 습한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나는, 주말 내내 쨍할 서울 하늘을 두고 굳이 거기까지 내려가 종일 비바람과 맞설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축축 끈적했다. 오전 일만 마치면 바로 갈아입을 간편복까지 가방에 욱여넣고, 중간에 뜬 시간에 뭘 하며 보낼까 하다가 눈에 띈 곳이 벡스코 전시장. 그래, 뭘 전시할지는 몰라도 에어컨 바람 시원한 곳에서 여유롭게 구경이나 하자.
오전 출장 건을 잘 마친 후, 비구름이 몰려오는 해운대를 등지고 지하철 두 정거장을 지나 벡스코에 이를 즈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크록스 차림으로 변신한 나는 가볍게 전시홀로 들어갔다. 전시회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입구부터 새우젓, 오징어젓, 각종 건어물 등 냄새의 향연은 지금도 꼬릿하다. 무슨 기계나 첨단 기술 전시회 등에만 가봤던 내게 이곳은 꽤 흥미로웠다. 홍삼의 대명사인 정관ㅈ 홍삼 상자처럼 보이는 낯선 이름의 홍삼 세트, 노랑과 검정이 예쁘게 어우러진 디월ㅌ 전동드릴처럼 보이는 짝퉁 드릴,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거울에 묻힌 기름때 얼룩을 한 번에 말끔히 지워주는 마술 걸레… ‘실소(失笑)라 하기는 싫소만’ 놀라움이나 기쁨으로 인한 웃음과는 거리가 먼, 결코 지갑을 열 일 없을 거라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던 바로 그때!
멀찍이서 어느 풍성한 아저씨가 다급하게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내가 이것만 20년을 연구했어요.”라며 대뜸 자신의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를 하나하나 보여줬다. 죄다 재주문하는 문자들에다, 중간중간엔 정수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이전’과 ‘이후’의 사진들이 보였다. ‘전자’는 대체로 희어멀끔했고, ‘후자’는 거뭇하다 못해 빽빽했다. “이걸로 머리 감아봐요. 2주만 써도 효과가 보인다니까? 이거 인터넷 정가가 3만 6천 원인데, 전시회 특별가로 3만 원에 드릴게.” 속사포처럼 그분은 그간 자신의 연구 실적과, 이 제품에 얼마나 좋은 한약재가 들어갔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제야 내 얼굴엔 그야말로 실소(失笑)가 만연했다. ‘쯧쯧… 정말 이런 게 있다면 이미 노벨상 타고도 남았겠지. 아니, 이런 약장수 말발에 넘어가는 팔랑귀가 있단 말이야? 날 뭘로 보고….’ 입에 걸려있던 실소의 입꼬리를 살짝 더 올리며 나는 고개만 까딱하고 돌아서 다른 부스로 걸어갔다.
먹고 사느라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 문득 거울을 자세히 보니 폭우에 쓸려 떠내려간 민둥산처럼, 안 보여야 할 정수리 두피가 보이기 시작했다. 외모 따위 신경 안 쓴다면서도 담배가 원인일 수 있다는 얘기에 2년 전 담배도 끊고, 원활한 혈액순환을 위해 1년 전부터 난생처음 헬스 PT까지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무슨 효모도 꾸준히 복용해 온 데다, 언제나 그래왔듯 야한 생각도 넘치도록 했지만, 딱히 차도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넌 사랑스러워”라는 노래가 다르게 들렸다. 왜 “머리부터”일까. ‘머리’야 말로, 0.3초 안에 상대를 인식하는 최초의 시각 정보고, ‘머리’부터 사랑스럽지 않으면, 발 끝까지 볼 필요도 없다는 것 아닐까. (한 줄의 사랑노래 가사 마저도 왜곡시키는 자격지심의 위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다.) 고작 손바닥만한 ‘뚜껑’ 유무가 그 존재의 가치판단에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더라는 것. 키파(유대 모자)라는 뚜껑을 덮고 통곡의 벽 앞에 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김유신 장군의 말(馬)처럼 내 발은 어느새 나를 다시 그 부스 앞으로 이끌었고, 나는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리는 대신에 짐짓 도도한 척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거, 한 통이면 얼마나 쓴다고요?” 떡밥을 물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을 애써 감추며, 그는 물건을 내어주고는 특별하지 않은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줬다. 고작 한 통 팔면서도 정성껏 설명해 주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나는 웃으며 한 마디 건넸다. “사장님은 이거 살 사람 알아보기는 아주 쉽겠어요.” 그는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저 멀리 가리키며 “저어~ 쪽에서 오실 때부터 알아봤죠.” 그날 밤늦게 귀가해서 씻으며 바로 써 보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해 봤다. “○○ 한방샴푸. 3만 원.” 아니, 전시회 특별가라며?
아침저녁, 샤워할 때마다 그 멀리서 공수해 온 황금빛 액체를 왼손바닥에 담아 한 방울이라 흘릴까 봐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하늘에 계신 풍성신께 빌 듯 두 손을 비벼 거품을 낸다. 열 손가락을 펴서 오랜 세월 막혔을지 모르는 모공을 하나하나 열고, 잠들었을지 모르는 모근을 하나하나 깨우는 심정으로 부드럽고 정성스레 거품 마사지를 한다. 헹굴 때도 한 가닥이라도 잃을세라, 비눗기가 남을세라 섬세하게 충분히 어루만져 주기를 한 달여. 조심스레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에 거울을 뚫어져라 본다. ‘음… 확실히 새싹 같은 솜털들이 자라는 것도 같은데? 양쪽 옆머리는 좀 더 굵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응? 잠깐, 근데… 내 귀가 이렇게 얇았었나?’
202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