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해는 저물어가고 싸라기눈까지 내리는 바람에 나와 아버지는 덜덜 떨었다. 아버지는 나의 팔에 의지한 체 평상(平床) 에 걸터앉았다.
" "형님. 아까 도와주이서 고맙심더."
알았다. 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니 갈길 가라. 알제?
"오늘 관기들 어디 있는데예? 형님."
"정신 못 차렸구마. 막걸리 땡기나 관기들 찾고 자빠졌네."
""형님아, 내가 이 거지꼴 하고 막걸리 먹으러 가겠십니꺼. 기생들한테 창호지 값 받을 게 있다 아입니꺼."
"참나, 사정은 알겠는데 오늘 잔치 있다는 말은 못 들었데이. 다음에 받으러 오면 안 되겠나?"
"새로 온 관기 하나 있는데, 사또 나리한테 수청을 안 든다 카이, 사또가 요새 며칠 동안 아전들 잡아 돌린다 카더라."
""혹시 그 아가 화심이란 기생이가?" "
"와 자네가 그 기생 이름까지 다 알고 있노. 진주목 교방(敎坊) 기생들 다 꿰고 있네 그랴."
아버지는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 "아까 이방 나가 난리통에 얘기했다 아이가?"
""허허. 이제서야 니 입에서 나리란 소리가 나오네. 아까는 미친 개처럼 덤비더니 참나! 다음엔 알아서 피해 다니라. 기생들은 동헌(東軒)지나 교방에 있을 기다."
" 한겨울이고 보리고개라 아마 그 아들도 끼니 챙겨 먹는지 모르겠데이. 안팎으로 뒤숭숭하니 괜한 시비에 얽히지 마라이."
문지기는 뒷짐을 지며 자기 갈길을 간다.
"덕신아, 지게 매라. 갈 길이 멀다잉." "아부지, 그냥 가면 안 되겠습니꺼? 이 난리를 쳤는데, 나 지금 뭔가 불안하데이." "이놈아, 이거만 갖다 주면 닷 냥이 손에 떨어진다. 집에 있는 니 어무이랑 동생 연도 끼닛거리 구해야 될 거 아이가. 싸게 싸게 앞장서라"
눈 덮인 진주목 내부를 에서 두 사람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옷차림은 관아의 관노들 옷차림 보다도 대조적으로 매우 누추했다. 낡고 해진 옷을 입고 다리를 절으며 걷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고, 눈빛에는 피로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아버지도 직감적으로 전달하려는 물건이 정상적인 물건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방 똥구머니라도 따라다닐 성격의 아버지였으나 닷냥이라는 돈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순위였다.
어는 덧 교방 앞에 도착하고 관노 하나가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누구고? 진가가 웬일이고?" "오랜만이데이." "아이구, 옷꼴이 뭐꼬. 어디서 굴렀나 왔나?"
몇 명의 관기들은 문을 살짝 열어 슬며시 보다가 다시 문을 닫는다. 아마도 창호지 값 받으러 온 줄 알고 지례 문을 걸어 잠그고 만다.관노는 부엌에서 관비에게 소리를 쳤다
"어이, 뜨거운 물 한 사발 가져온나. 진가가 왔다 아이가"
그러면서 아버지와 나를 부엌 근처 평상위에 앉으라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 아버지가 남겨 논 미지근한 물을 마저 들이켠다.
"저기 끝방에 화심이라꼬 새로 온 관기가 있대이."
"어, 맞다. 나 잠깐 화심이 좀 만나보면 안 되겠나?"
"아이, 말도 마라. 사또한테 수청 안 든다고 이방이 아침에 와서 물만 주고 곡기 끊기라고 명 내렸다 아이가."
"아따, 형님. 내가 형님만 따른다 아이가. 잠깐이면 된다 안카나. 근데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년은 수청을 안 든다노? 이 잔치 저 잔치 불려 다니다가 눈먼 졸부라도 만나서 개가하면 될 긴데..."
"말조심해라. 저분은 충청도에 있는 어느 유생의 여식이었는데, 아비라는 사람이 뭘 잘못 먹었는지 나라님한테 안동김씨 일가를 내치고 나라 기강 잡으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만 발각돼서 온 집안이 다 사라졌다 아이가. 아비는 한양으로 압송되다 혀 깨물고 자살하고, 어미는 목 매달아 죽고. 형제들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지만 저 아가씨는 기구한 팔자에 천민 돼서 여기 관기로 온기다. 나도 호칭 부르기 어렵다. 아가씨라 하기도 뭐하고, 나는 말도 잘 안 붙인다."
"아따, 형님. 내가 봄 되면 부채도 팔고 창호지도 팔아갖고 탁주 한 잔 살 테니까, 좀만 봐주이소."
교방집 관노는 아버지가 교방 들락거린 이력을 알기에 눈 쓸던 빗자루를 다시 부여잡으며
" 아따 내가 모르고 화심 아기씨 있는 곳을 눈을 안 쓸었네그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털썩 털썩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1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