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Dec 13. 2022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되어지는.

'성장'에 대한 소고

'인생은 선택'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에 반박한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나를 선택하는,

즉, 나는 선택되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분명 어제 죽을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느닷없이 죽으니까.

나도 그럴 수 있었을텐데

하루는 나를 살려 오늘을 살게 한다.

하루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별 특별함없는 일상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우리는 떤다.

불안감에, 긴장감에, 두려움에 떤다.

코로나가 그랬고 느닷없는 금리인상이 그렇고 전쟁, 사건사고들이 난무한 세상에서

일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선물이다.

일상은 오늘도 나를 안전하게 살아도 된다고 선택해줬다.



왜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돈이 없을까?

왜 나는 이토록 최선을 다하는 데 운이 없을까?

왜 나는 지독하게 치열한데 기회가 없을까?

왜 나는 이렇게 치밀한데 정보에 둔할까?

돈도 자격을 갖춘 이에게 스스로 들어앉으며

운도 대가를 치른 자에게 다가가며

기회 역시 눈뜨고 사는 이에게 보이는 것이며

정보도 맑게 뚫린 귀에 들리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돈도 운도 기회도 정보도 더 많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내가 선택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꿰뚫듯 들여다보는 그것들이 나의 자격을 검증해 나에게로 오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존재할 뿐인데 

계절도 알아서 찾아오고 덕분에 겨울채비도 알아서 내 일상에 등장하고

태양도 시간되면 나에게 오며 바람도 비도 번개도 천둥도 모든 자연이 알아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눈이 왔으니 곧 꽃도 오겠지

나는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나에게 온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태어나니 부모가 생겼고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이어 형제가 생겼고 자식이 생겼다.

'없었는데 생겨났다'.

친구도 알아서 생기고 알아서 퇴장하고

지인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도 인생 어떤 언저리에 등장하고 알아서 나간다.

내가 친구를, 사람을 선택한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내가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귀인'을 바래서는 안된다.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딱!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사람을 내가 선택해 데려오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에서 우리는 스스로 이 것을 증명해낸 셈이다. 선택할 수 없으니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내게로 오는 것은 특히, 나의 선택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있다.

나는 그들에게 선택되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내 생각도 내 선택이 아니다.

불현듯, 갑자기, 느닷없이 생각나네! 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내가 하는 것이면 느닷없이 하지 않을 것인데 

이 생각이란 놈 역시 알아서 내게 찾아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짓까지 하며

내 정신을 바쁘게 몰아대니 

여태 '내가 생각한다'는 모순에 빠져 있다면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

생각도 나를 택해 나에게 개입된다.


내 감각도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라면 내가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눈에 티끌이라도 들어가면 나는 아무리 눈을 뜨려 해도 뜰 수가 없을 지경이니 내 통제밖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감각을 선택할 수 있다면 같은 타격에 각자 원하는만큼만 감각을 느끼면 된다. 하지만 같은 타격이 주어질 때 대다수가 비슷한 감각으로 반응하니 감각 역시 내 선택이 아니다. 아마 무언가, 언제인가 내재된 기억이나 자극에 의해 선택 진화된 것이겠지.


나의 업(業)도 그렇다.

마치 내가 그 직업을 선택한 듯하지만

그 자리에 내가 필요한 인물이어서 어떠한 끌림에 그 곳으로 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연하게', '신기하게도', '어떻게 그런 일이', '기가 막히게도', '운이 좋아서' 와 같은 경우가 생겨서는 안된다. 

굳이 나여야만 하는 자리여서 내가 선택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매일 새벽독서에 열올리는 나는 

책이 날 선택해준 것에 늘 감사한다.

내 머리로는, 내 정보망으로는, 내 시선안에서는 이런 책이 내게 올리가 없다.

서점에 빽빽하게 꽂힌 그 많은 책들 속에서 이 보물같은 책을 내가 알아챌 리 없다.

책은 항상 내게로 와준다.

책 속의 깨달음이 내게로 알아서 찾아온다.

'다음에 무슨 책을 읽지?'를 고민할 이유가 아예 없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책이 내게로 등장할 테니까.

그러지 않고서는 내가 야콥센이나 블레이크나 루크레티우스를 알아낼 재간이 없었을테니

책이 '이번엔 김주원이다!'라는 판단이 설 때 나를 선택해 내 눈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자기들 갈 길 어디에서 선택한 나를 데려다 어딘가로 나를 흘려보낸다.

마치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선택할 수 있을 것처럼, 내가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라.

과연 내 선택대로 모든 것들이 이뤄졌는지.


우리는 선택되어지는 수동의 삶을 사는 것이다.

제대로 잘 선.택.되.어.질.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내는 주체적이면서 능동적인 행동만이 내가 할 일의 전부다.

지금 자리에서 선택되어진 다음 자리까지 제대로 잘 안착하는 것을 나는 

성장이라 명명하려 한다.

알맹이로서의 나, 말하자면 총체로서의 나를 그대로 유지 내지 보호한 채 

거죽으로서의 나, 말하자면 객체로서의 나를 갈아입고 갈아끼우며 자리에 걸맞게 나의 모양새를 갖춰, 

떠나는 것과 줄어드는 것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것들을 쉬이 받아들이며 

선택된 그 자리에 제 때 제 모양새로 서 있도록 걷는 걸음이 성장인 것이다.

그리고 제 때 제 모양새를 갖춰야 하는 것이 역할이며

갖춰진 제 때 제 모양새가 목표이며

제 때 제 모양새가 되기 위해 매일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내 일상이어야 한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인들 어떠한가. 

그 모양새여야 그 자리에 적합한 것을.

혹여 넘치는 모양새인들 어떠한가. 

그 모양새여야 다음 자리의 부족이 메워지는 것을.

혹여 미운 모양새인들 어떠한가. 

내가 밉고 다른 것이 이뻐야 할 차례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모든 것은 위로 향하다가 곧 아래로 꺼져버린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불길이 위로위로 그 어떤 힘에도 아랑곳없이 치솟아 오르지만 결국엔 땅으로 꺼지든 공기중에 소멸되든 그것은 아래로 곤두박칠치게 되고 결코 만져본 적 없는 별도, 번개도 모두 땅으로, 태양의 강렬함도 땅으로 내리꽂힌다. 미숙한 인간인 나 역시 그렇다.  내 키가 위로 자라다 나이들어 다시 아래로 내려가듯, 내 기억이 위로위로 뻗치다가 서서히 소멸되듯, 내 열정과 의지와 투지가 힘껏 솟구치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나의 성장도 그리 갈 것이다. 


노령이 나를 그리로 데려가는 걸음에 나는 손잡고 잘 따라가주는 것이 선택되어진 나로서 충실히 걷는 걸음임을 나는 안다.

나의 모든 것이 한참을 그리 솟구치더니 이내 안으로 수렴되어 단순하고 조용하게 수동적인 삶으로 나를 안내하는 것 역시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이 것이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도 나는 안다. 

죽을 때까지 내 안에 솟구치는 그 무언가가 있더라도 어쩌면 그것은 땅으로, 안으로, 깊이로 수렴되기 위한 솟구침일 것이니 이제 내면으로, 아래로 나를 숙여주어야 할 것이라는 것도 나는 안다.


내가 흘러 떠나간 그 자리는 시들고 소멸하며 

내가 흘러 서있게 된 그 자리는 생성되고 활짝 피어나도록 나는 늘 선택되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지금 이 순간, 

딱 나에게 어울리는 자태로, 

딱 내가 해야 할 몫만큼 거머쥔채

딱 내게 주어진 업을 행하는 것에

그 어떤 것을 염두에 두거나 의도하거나 탐하지 않은 상태에서

날 선택하기 위해 오는 모든 것들에게 안심을 주어야 할 것이다.



#김주원교수 #지담북살롱 #선택 #새벽독서 #성장





이전 06화 결코 내게서 해방될 수 없는 고집불통 너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