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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Feb 21. 2023

이불을 뒤집어쓴 방랑자에 관하여

D-238

⠀포근한 이불, 이불 속의 풍성한 충전재가 오랜만에 날 감싸 안은 밤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지쳐 있던 인간이 무생물에 넌지시 위로받은, 가시 돋친 영혼이 가벼운 솜털의 품에 꼬리를 완전히 내린, 그런 황홀한 순간이었다. 한 글자의 아늑함은 똑같이 좁은 공간임에도 신선한 따뜻함을 선사했고, 푸릇푸릇한 공기의 청명한 무게가 내 부서진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물며 도미노처럼 전날부터 쭉 자빠져 있던 과거의 비루한 일상들과 어제의 평범함에 몸통이 짓눌린 오늘의 모음, 그리고 그 밑에 자리하고 있던 지겨운 흙먼지들은 단숨에 눈앞에서 흩어져 버렸고, 그 어느 때보다 산뜻한 이불 안팤의 세상이 부드럽고 친절한 촉감을 가져다주며, 과히 충격적인 안락함이 나를 덮치는 하루임이 틀림없었다. 덕택에 나는 그 속에서 꿈꾸는 듯한 어조로 새로운 내일을 마구 이야기해댔고,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적인, 그리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호흡들만이 그 속을 가득 메워 힘 빠진 충전재를 있는 힘껏 붙들고 있었다. 이불의 보드라운 피부결에 얼굴을 비비고, 구겨진 공간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한없이 맡을 수 있었던 끝겨울의 첫날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북적거림, 그리고 어쩌면 그토록 바랬던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행복이 묻은 어수선함은 예상치 못하게 내 귓속을 괴롭혀댔다. 무릇 다정한 가족애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집 안은 고른 숨만이 내쉬어지는 줄로 알았는데, 정말 예상치 못했던 경멸이 온갖 미소들로 흠집 난 몸속에서 몇 번이고 들끓고 있었고, 불쾌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자꾸만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속박 없는 첫날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돌연한 혼란에 휩싸여 애매한 괴로움을 자유로이 느껴버리는 것이었다. 몰라보게 차분해진 스스로를 향한 의문에, 그리고 포근한 이불을 뒤집어쓴 한 인간의 정체성에, 그리고 이 세상의 부질없음과 우스꽝스러움에 나는 하루하루 고요한 이불 속에 파묻히고만 싶은 생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전 날에 눈이 마주쳤던 여행객들의 동그란 바퀴들은 들뜬 기억 속에서 네모나게 왜곡되고 있었으며, 이윽고 나는 다시 구겨진 인간이 되어버리고 싶은 생각에, 혼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꾸만 불쾌한 낮잠을 청하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과분한 공간과 작위적인 공기, 그리고 그 틈 사이에 고스란히 자리한 오묘함과 반쯤 죽은 행복, 그리고 핸드 드립 커피의 진한 커피향과 어우러진 원인 모를 공허함은 카페 안으로 도망쳐 온 나를 지독히 에워쌌다. 어지러운 집을 벗어나서도 쓴맛의 잔무늬는 점점 더 무뎌질 뿐이었고, 현재에 이르기 위해 거쳐 온 자잘한 굴곡들의 해괴한 미소가 자꾸만 눈앞에서 얼쩡거렸다. 이윽고 커피 한 모금과 함께한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삶의 가치에 관한 조금의 고찰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느낌이 이상했는데, 내 들뜬 감정들과 자잘한 계획 하나하나가 너무나 부질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하물며 오랜만에 마주한 주변인들의 무심한 표정은 단순히 멈춰 있는 근육이 아니었고, 그 뒤에 감춰진 정서적 허무들은 내 유약해진 눈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붙잡히고 있었다. 허나 나는 그런 동질의 인간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우수 어린 미소를 띠어버리는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다 식어버린 커피잔을 빠르게 비우고서 그 공간을 무작정 뛰쳐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익살스러운 인간이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더 요란한 생기가 몸속을 싸돌고 있었고, 근방의 정적인 입꼬리들을 다 일으켜 세워버리는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특유의 익살 섞인 언행과 능청맞음으로 사람들과의 시간을 즐기고, 비로소 혼자 남아 있을 때 묵혀 뒀던 악감정들을 이불 속에서 뱉어버리는, 물론 혼자서 분노를 마구 표출해버리거나 신경질을 내버리는 그런 반미치광이는 단연코 아니고, 메모장에 자연스레 감정을 버리고 몇 곡의 서글픈 음악을 들으며 그 위에 눈물이나 떨어뜨리는 기질이었다. 그렇게 나는 짧은 며칠간 또 여러 입꼬리들을 위로 잡아당겼고, 시시각각 득의만만 해지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혼자서 조촐한 성취감을 누리곤 했다. 세상이 마냥 흥미로워 보이는 눈동자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달팽이관이 잘 융화된 순간들은 다행히도 아예 없진 않았는데, 작정하고 한 쪽만을 택할 용기는 없던 야비한 인간은, 어떻게든 유순한 태도를 취하며, 웃으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아로새길 뿐이었다.

 

⠀그러다가도 새까만 밤에 접어들 때면, 술을 온몸에 뒤집어쓰듯 퍼마시고만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입술이 제멋대로 열고 닫히기를 반복하고, 잔뜩 취한 채로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이 세상의 난해함에 관해 이야기하고만 싶은 욕망에 자꾸만 잠식당하는 나였다. 압박해오는 시간과 함께 고루한 인간들의 삐뚤어진 치열, 그리고 몰염치한 질서들과 그곳만의 느른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에서 은연히 떠오를 때면, 나는 구토를 느끼며 세상을 향해 형용할 수 없는 실언을 뱉고만 싶어지는 것이었고, 그저 보고팠던 이들에게 뒤엉킨 머릿속을 자연스레 꺼내 보이고만 싶어지는 것이었다. 내 삶과 소주잔에 퍼부어지는 액체량 사이에 등호를 대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무식하게 많은 양을 목 너머로 들이붓기만 한다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노여움이 싹 숨을 거둘 것만 같은 상상에 기분이 단숨에 좋아져 버렸던 것이다. 진득한 술 냄새가 풍기는 공간을 마음껏 쏘다니며, 그 틈 사이에 틀림없이 숨어 있는 의협심과 곰살궂은 인간성들을 빤히 들여다보고, 나의 병든 계절을 깔끔히 살균시켜줄 대화를 곁눈질하다 보면, 내 구겨진 심장에서는 충혈이 일어나 예쁜 색깔이 온몸을 적시며 나를 치장해 줄 것만 같은 허상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씁쓸한 끝 맛만이 남은 새벽의 연속이었고, 혼잣말만 중얼거리며 무사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한 손님에 불과했다. 물론 그런 낭만에는 응당 역한 술 냄새가 따라붙는 법이기에, 이튿날의 자유를 방해할 광란의 밤은 또 그리 원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루하루 마주하는 사람이, 공간이, 그리고 여러 색깔과 경험이 모두 감사한데도, 금세 기울어가는 오후는 여전히 미웠고, 이곳에 닿기 위해 쌓아 온 모든 사소한 고단함들의 총합은 문득 손톱만도 못해 보였다.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예쁜 것투성이인데도, 나는 이따금 실패하는 방랑자인 것만 같았고, 이 세상의 눈초리들은 하나같이 개인에게 향하고 있음을 절감하며, 나 또한 나 자신과만 조우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리웠던 바닷바람을 오랜만에 정면으로 쏘이며, 짠 내가 풍기는 커피를 마시러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단 하루도 끊김 없이 마주한 커피향은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나는 그저 아무도 없는 공간 속에 울리는 개인의 홀짝거림이 듣고 싶을 뿐이었기에, 새로 가져온 책의 문장들로 다 마신 커피를 갈음해가며, 오랜 시간 그곳의 공허함을 외로이 즐겼다. 그렇게 나는 다시 어릿광대를 자처하며 휘영하게 살아가기로, 커피 한 잔과 함께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며 당돌한 내일을 살아가기로 독백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느닷없는 스스로의 부르짖음에 또다시 흠칫하며, 갈수록 모호해지는 삶 앞에 미족한 허리를 굽히며 조용히 그 공간을 벗어날 뿐이었다.

 

⠀그러고서 나는 곧바로 광활한 바다의 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환영하는 바다의 얼굴은 그새 늙은 듯 보였는데, 처세술에 능한 나는 천연덕스럽게 살가운 표정을 해 보였다. 그 덕에 나는 오랜만에 두 눈으로 바닷물을 적실 수 있었고, 내 얼굴에 달라붙은 당혹감과 일말의 해방감 같은 먼지들을 적절히 잘 털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푸른빛이 온 피부에 스며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인간들의 그 어떤 간섭들로부터 귀를 봉인한 채, 호사스러운 해질녘의 고요함을 만끽했다. 이윽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운전대를 잡은 순간, 내게 들이닥친 감정은 여유로움도 아니고, 후련함도 아니고, 아쉬움도 아닌, 심각한 수준의 무지함이었다. 그저 바다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흐릿한 구름들을 쳐다보고, 끝겨울인 나머지 아직은 쌀쌀한 바람에 볼이 시뻘게지도록 두들겨 맞다가 맞닥뜨린 그놈의 방향 조정은 내겐 너무나 어렵고 난감한 과제였다. 잠시 멍해지는 머릿속과 더불어 오른발은 심히 경직된 상태를 유지했고, 앞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물은 어떻게 닦아내야 할지에 관한 고민과 갑작스레 떠오른 우유 사가기 임무는 시동 걸기를 더욱 늦추는 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전석에 자리한 지 장장 삽십분여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두 개의 바퀴를 앞으로 굴릴 수 있었다.


⠀물론 재미적 요소는 충분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감정들이라도 존재하지 않던 포근함에 완벽히 매료되었던 터라, 도저히 만족하지 않을 수는 없던 흥분의 수면들이었다. 만약 그 한 글자마저 재미가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이불 바깥으로 통하는 틈을 아예 내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저 조용히 숨을 참고서 불과 몇 분 뒤 보드라운 충전재에 찔린 채로 누군가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잘 살아있을 뿐이고, 사실 기쁨이 슬픔보다 두 배는 더 큰 잔여물로 남아있을 뿐이며, 다소 귀가 먹먹한 순간이 이따금 존재했을 뿐이고, 나는 그저 앞전에 얘기한 대로 문장에는 익살을 섞지 못하는 이중인격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억에 확실히 박혀 있는 그때의 느낌은 첫날의 충격적인 포근함이며,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이튿날의 모멸감이다. 또한 그 이후부터 엄습해온 압박들은 사실 그렇게 숨이 막혀 오진 않았고, 여유로움과 불안이 혼재된 이상한 감정들이 날 거푸 두드렸을 뿐이며, 난 그렇게 시간의 야속함에 헛미소를 지으며 어느새 기차 속 손잡이에 마음을 매달릴 뿐이었다. 따라서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익살스러운 사람이고, 이 세계의 그 어떤 이보다 묵직한 성인으로 거듭나는 중이며, 그 누구도 나를 위할 필요는 응당 없는 것이고, 나는 그저 종이 안에서만 울음을 터뜨리는 방랑자일 뿐이다. 그저 이불을 뒤집어쓴 자유를 다시 느끼고픈 외딴곳의 방랑자일 뿐인 것이다. 물론 지금도 재미는 충분하고, 방랑자임은 죽어도 바뀌지 않는 이 현실도 아직까지는 문제없으며, 명랑한 떠돌이의 삶은 생각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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