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고 막내입니다.
[눈칫밥을 먹어 배부른 막내]
- 부제: 눈치 보기는 내 주요 업무 -
3년 차 막내의 삶 1
‘눈치 보기’
첫 출근 때부터 지금까지 제일 잘하는 것을 꼽으라면 당연 ‘눈치 보기’다. 막내로서의 삶이 시작된 이후 뼛속까지 깨달았다. 왜 눈칫밥, 눈칫밥 하는지. 눈칫밥을 먹으면(눈치를 보면) 진짜로 배부르다. 많이 먹었다 싶으면 배가 불러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게 싫다거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고, 눈치 보기 스킬이 쌓여 그게 주요 업무처럼 느껴진달까. 이제는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 편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어느 누가 회사에서 눈치 보지 않겠냐만, 이 눈치 보기는 마치 신입 때의 긴장이 아직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느낌에 가깝다. 그러니까 입사한 지 석 달 차쯤 된 신입사원이 회사에서 눈치 보는 정도의 수준이 3년째 반복된달까. 꼰대질 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느슨해지진 않는다. 다만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한다. 선배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입사 후 며칠은 눈치 로봇에 가까웠다. 질문이 들어오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기계적인 웃음을 곁들여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리액션을 해야 할 것 같았고 흘리듯 지나가는 모든 말에 신경 써 답변했다. 혹시라도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면 눈치를 보다가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 대답하곤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꺼낸 말이 너무 생뚱맞진 않았나 싶어 분위기를 살폈다. 구태여 고된 삶을 자처했다.
눈치를 볼수록 죄송할 일도 많아진다.
한 번은 눈치 보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상황은 이러했는데, 우리의 리더가 급하게 저녁 식사가 잡혀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을 예약하고자 했다. 당일 예약이 어려운 곳이라, 내게 자리가 남아있는지 물어봐달라고 급히 요청했다. 즉시 상황을 확인했지만, 인원이 꽉 차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예약이 꽉 차서 식당 예약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위와 같이 상황을 전달했고 리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자리로 돌아가는데 팀장님이 다가왔다.
“있잖아 막내야. 죄송한 일에만 죄송하다고 해야 해. 지금 상황은 네가 죄송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
그는 꽤나 따끔하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듣고 보니 너무 맞는 말이라 머리가 띵했다. 예약이 안 된다는 말에 일단 마음이 불편했고, 리더가 원하는 일을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예약이 가능한지 물어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리더가 요청한 바를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내 잘못인 마냥 그의 기분을 살피고 의기소침했던 것이다.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식당 사장님을 잡고 안된다는 예약을 해달라 계속 조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불필요하게 눈치 보고 있고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지금이야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비슷한 상황이 오면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3년 차 중고 막내로서 깨달은 건 눈치는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마 베테랑 선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입 때는 눈치를 보는 것도 큰 업무였고, 내 눈에도 자신이 뚝딱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나아졌겠으나 일단 중고 막내는 분위기를 읽는 것에 익숙하다. 상대방의 단어 선택이나 어투, 표정의 변화를 잘 알아차린다. 그 변화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도 아주 조금 나아졌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첫 회원 행사가 진행된 날이었다. 기획부터 진행까지 내가 메인으로 가는 사업이었기에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온라인으로만 소통했던 회원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자리었고, 단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였다. 기대와 부담이 컸다. 당시 일한 지 6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스킬도 없고 자신감도 없을 때였다. 장소를 대관하고 식당을 찾아 협의해야 하는 것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이전 자료를 찾아보고, 팀장님의 조언을 열심히 참고하여 준비했다. 행사를 진행하는 곳도 몇 번 가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리허설도 해보고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떠올려보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힘들었다. 혹시 디테일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지난번 대비 예산을 과하게 쓰지 않았는지 신경이 쓰였다, 스크립트를 짜 놓고도 불안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도 선배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며 잘하고 있는지 체크했다. 드디어 당일, 행사는 준비한 대로 흘러갔다. 공들여 제작한 단체 사업보고 영상을 함께 보는 시간이 되었다. 회원과 임원들의 분위기가 어떤지 읽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에 심히 집중한 나머지 영상이 끝난 뒤 해야 할 다음 순서를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팀장님이 먼저 알아차리고 대신 일을 진행했다. 그 순간 나는 고장 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눈칫밥을 온몸으로 욱여넣었다.
실수가 있어도 개의치 않고 다음 해야 할 일을 우선순위로 두면 됐었다. 우선순위가 ‘눈치 보기’가 되자 모든 게 힘들어졌다. 나도 모르게 선배들과 임원들의 표정을 살피면서 일하느라 결국 다음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모든 순간에 선배들은 나보다 빨리 움직였고 내 생각의 폭은 좁아졌다. 뭔가에 씌었는지 잘하려고 할수록 일은 어긋나고 팀장님이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결국 팀장님에게 혼나고 말았다.
울고 싶었고 결국 울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눈물을 터트렸다. 열심히 준비한 첫 행사였는데! 잘하고 싶었는데 스스로가 왜 이렇게 한심해 보이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크게 혼난 것도 아닌데 그땐 너무 속상했다. 영혼이 반쯤 나가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A5용지 크기의 명찰을 목에 걸고 다닌 것도 몰랐다. 힘없이 돌아간 막내가 신경 쓰인 팀장님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통화 중 펑펑 울고 말았다. 팀장님은 내가 잘못한 부분이 뭔지 짚어주었다. 그리고 본인이 행사 중 혼낸 일을 사과했다. 그 말을 듣고 또 울었다. 다음 날 한 선배는 마음도 모른 채 행사가 수월하게 끝나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공감하지 못하고 혹시 말뿐인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도 어쨌든 행사는 끝났다.
선배들에겐 역대급으로 순조로운 행사로 평가받지만, 나에겐 역대급으로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기억은 3년간 비슷한 행사가 진행될 때마다 본보기가 된다. 진행단계에서 눈치를 덜 보기 위해 준비단계에서 분위기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보고를 올릴 때 몇 번 더 확인하고, 올리고 난 뒤에도 ‘혹시 이렇게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하지!’, ‘변수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하지?’ 생각한다. 걱정이 많은 성격도 한몫하지만, 결과적으로 ‘눈치 보기’는 일을 더 철저히 준비하게 만든다.
긍정적인 면이 하나 더 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살피는 ‘눈치 보기’는 내가 더 화목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물론 눈치를 많이 본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건 아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일하는 자들을 살피고 할 일을 묵묵히, 조금 더 과하게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나아가 그들이 일 외의 다른 것에 신경을 두지 않도록 사소한 부분을 더 메우려고 역량껏 노력하고 있다.
‘눈치 보기’는 결국 나를 보다 준비성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고, 팀을 화목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리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눈칫밥 먹는 막내로 살아갈 것 같다. 그게 불편할 리는 없다.
어쨌든 눈치 보는 것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