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고 막내입니다.
[막내? 책임자? 그 미묘한 경계에 대하여]
3년 차 막내의 삶 2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하는 환경을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상근자 수가 많지 않다. 팀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팀당 한 명씩 소속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는 회원홍보팀의 유일한 근무자, 즉 팀원이자 책임자인 셈이다. 그 전체 팀을 아우르는 사람이 글에서 종종 언급되는 10년 차 선배, 우리의 팀장님이다. 팀의 책임자는 다른 팀의 팀원으로 소속되어 일하고, 팀 내 주요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서로 크로스 체킹을 하며 협업하고 있다.
이는 장단점이 매우 두드러지는 환경이다. 장점을 말하자면, 사업을 진행할 때 오로지 내 생각대로만 기획안을 구상하고 리드할 수 있다. 주위 얘기를 들어보면 기획 단계에서부터 팀원과 의견이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던데, 우리는 처음부터 이견이 생길 일은 없다. 무엇보다 홀로 책임자가 되어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평가하는 과정은 본인의 성장에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매우 매력적인 장점이다. 사업이 종료된 후 찾아오는 후련함, 뿌듯함, 성취감까지도.
단점은 웃기게도 장점의 특징과 같다. 일단 한 명이 하다 보면 일이 많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는 사람 마음을 괜히 급하게 만드는데, 붕 떠 있는 느낌이 꽤나 불편하다. 장점과는 반대로 혼자 구상하다 보면 기획 단계에서 지나치게 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건 아닐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좀처럼 일을 진전할 수가 없다. 고민을 수차례 반복하다 시간에 쫓기면서 진작 해야 할 기획 보고를 제때 못하기도 한다.
“오늘은 보고 올려야 할 것 같은데, 아직이니?”
팀장님의 걱정 섞인 말에 부랴부랴 회의에 들어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면, 나 자신도 정리가 안 돼서 과정 내내 찝찝함을 경험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이때 멘탈도 유리처럼 깨지기 쉬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자칫 ‘눈치 보기’라도 반복되면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이 특징은 사람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다만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지금도 완벽하게 적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입 때는 일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그 당시 7년 차 선배였던 팀장님이 있어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지만, 본인 일만으로도 바빴던 사람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팀장님은 아홉 정도까지는 물어봤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의지할 수 있는 건 팀장님과 인수인계 외장 하드뿐. 매번 맞게 굴러가는 건지 확신이 없었다. 근무한 지 좀 되면 해야 할 일도 점차 눈에 보여서 업무량도 많다고 느껴졌다. 혼란이 매일 찾아왔지만 그건 둘째 문제였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불확실 속에서 겨우 만들어낸 결과물이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엉성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없어 곤욕스러웠다. 그럴 때는 내가 초안을 세워두면 이렇게 저렇게 살을 붙여줄 팀 선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정말 매일 생각했다. 팀장님 덕분에 방향을 잡아가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팀장님은 나와 팀이 달랐고, 늘 바쁘게 단체의 중점사업을 맡고 있었다. 다 떠나서 내가 소속된 팀의 책임자는 나였다. 하루빨리 만족스럽게 해내고 싶었고 팀장님 좀 그만 귀찮게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입사 후 처음으로 소식지 발행 업무를 시작했다. 소식지 제작을 위해서는 먼저 콘셉트를 확정하고, 콘셉트에 맞게 단체 사업 보고, 활동 계획, 인터뷰, 캠페인 등의 내용을 구성한다. 구성이나 디자인 작업처럼 전반적인 일은 내가 하지만 각 사업팀 소식에 실릴 원고는 사업 담당자에게 받아야 한다. 소식지에는 사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인데, 그 내용은 담당자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즉 사업팀 도움 없이는 작업이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나는 선배들에게 원고를 받아 매끄럽게 다듬고 보기 좋게 가공하는 작업을 한다. 과정에서 추가되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들과 의논하면서 원고 작업을 마무리한다.
첫 소식지 작업도 매뉴얼에 따라 움직였다. 그때가 입사한 지 열흘이 채 안 되었을 때인데, 선배들에게 원고를 요청하는 것도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야 할 만큼 군기가 잡혀 있었다. 여자저차 데드라인 안에 원고를 받아 나름대로 가공한 뒤 소식지 시안을 만들었다. 이어서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선배들에게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보이면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각자 피드백 파일을 넘겨주었고,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을 진행했다. 그러다 지금은 우리를 떠난 한 선배의 피드백을 보고 멈칫하고 말았다. 내 눈으로 보았을 땐 그의 수정 요청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이 많았는데, 없어도 무방할 것 같은 중복된 내용, 원래 것이 더 나은 표현들이 그랬다. 수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하다 일부만 고치기로 했다.
당시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오늘 안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 그래야 계획대로 소식지를 발행할 수 있다.’ 이 생각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마음 한편에는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가 자기 의견에 토를 단다고 생각할까 걱정도 됐다. 서툴렀던 나는 선배와의 논의 없이 몇 가지 수정만 반영해서 시안을 만들었다. 다음 날, 수정 시안을 본 선배는 매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마디가 이토록 불편할 수 있을까. 그때로 돌아가 선배의 차가운 표정과 말투, 얼어붙은 분위기를 마주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고개를 젓게 된다. 아무튼 어떻게 해야 그에게 말을 잘 전달하고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대하기 힘든 유형의 선배였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일단 선배 피드백이 반영된 부분을 짚고 왜 수정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에 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수정한 문구가 내용상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날카롭게 주장했다.
일을 떠나서 차갑게 뱉어내는 말과 사사건건 날을 세우는 태도에 나도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봐도 선배가 말하는 부분은 겹치는 내용이 있어 그다지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분량도 원래 것보다 길어져서 앞뒤 다른 문장을 다시 다듬어야만 원고 분량을 맞출 수 있었다. 수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 데드라인을 넘길 수가 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잠시 멘탈이 흔들렸지만, 선배가 해당 파트의 담당자인 만큼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우선 문제의 내용을 추가한 뒤 중복되는 부분을 찾아 내용을 조금씩 바꾸었다. 문장들을 간결하게 정리해서 잡아둔 레이아웃이 망가지지 않도록 수정을 마쳤다. 마음을 졸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인쇄 데이터도 기간 내 잘 넘겼다. 그런데 너무 찜찜했다. 마치 선배가 내 업무와 권한, 심지어 나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일어날 힘이 없었다.
애초에 모든 의견을 수용하는 게 맞나. 권리를 침해당하는 거북한 기분.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다른 건 배제하고 일로만 따져봤을 땐 일과 소통에 서툴러 발생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선배도 홍보팀 책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겪는 분량이나 데드라인의 문제는 몰랐을 거다. 만약 피드백을 그냥 넘겨야 한다면, 일에 쫓기더라도 사전에 분명히 전달하는 게 순서였다. 상의만 잘했어도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진 않았을 텐데. 일을 키운 건 나였다. ‘누굴 탓하나.’,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꽁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생각하면서도 선배의 표정이 떠오르는 순간, 시든 꽃처럼 어찌나 축 처지던지. 상황을 지켜본 팀장님이 멍 때리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팀장님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알아. 그렇지만 우리는 각자 팀장이자 팀원이잖아. 책임자가 팀원한테 요청하고 논의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일을 나눈다고 생각해서도 안 돼. 네가 우리한테 당당하게 말해야 우리도 너한테 요청하고 분담하는 게 쉽다? ‘협업’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점이야. 이제 알았으니까 다음에 소통하는 데 더 신경 쓰면 돼.”
소통의 중요성! 맞다. 일의 책임자는 나였다. 근무한 지 얼마가 되었건 담당자로서 논의해야 할 부분을 건너뛴 건 큰 잘못이었다. 절절거릴 필요도 없었다. 선배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지레짐작하는 행동도 미숙한 행동이었다. 모든 일은 소통의 부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과 헤어지자마자 근무 일지를 써 내려갔다. 제목은 ‘소통과 협업의 중요성’ 소통은 협업의 가장 중요한 도구! 고이 적어두고 뼈저리게 배웠건만 왜 아직도 시작이 그토록 고민스러울까.(아마 팀장님이나 우리의 리더도 어렵겠지?)
업무 책임자가 되었으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끝내는 것이 마땅한 법. 그리고 그 일에 협업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면 그것 역시 잘해야 한다. 충분한 소통과 그로부터 모두 만족하는 글을 완성하는 것, 나아가 재밌고 잘 읽히게 만드는 것. 이게 내 역할이었다. 선배 입장에서는 본인 파트에 수정이 필요한 내용이 보완되지 않았고, 담당자가 상의조차 안 했으니 기분이 상했을 만하다. 입장 바꿔보면 남 생각이 어떻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제대로 홍보되지 않으면 안타까울 것 같다. 이유도 모른 채 본인 의견이 쏙 빠져있는 걸 본다면? 나는 선배와 달리 말할 수 있었을까.
‘단체 홍보’ : 우리 활동을 명확하고 흥미롭게 전달하는 것!
내가 단체에 소속된 이유 자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하나의 홍보물을 만들더라도 소속된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야말로 진정성이 담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단체처럼 모든 일에 협업이 필요한 구조에서는 앞으로도 충분한 소통이 긴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항상 잊어선 안 되는 책임자의 핵심 임무다.
3년 차가 된 막내는 소식지 발행 업무를 이제 열 번도 넘게 진행했다. 이상하리만큼 항상 긴장하지만, 또 그것만큼 재밌는 업무도 없다. 선배들이 때마다 각자의 시각으로 피드백을 주는 덕분에, 결과물은 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아직도 선배들에게 요청하는 일이 쉽진 않지만 야속하게도 자주 할 수밖에 없다.
“당당하게 요청해, 아니 요구해!”
“그게 네 일이라니까?”
선배들이 말하면 반사적으로 “넵, 그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사실 그러고 있진 않고, 어렵지만 전략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협업이 더 쉬워지도록. 선배들에게 원고를 받으면 내용을 해치지 않고 매끄럽게 다듬으려 아등바등 용쓰고도 있다. 갈수록 만족도가 높아지는 간행물이 쌓일 때마다 배가 부르다.
신경 쓴 만큼에 비례하는 결과처럼 기분 좋은 쾌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