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에 진심인 직장인이 행복해질 확률
[아직 못 먹어 본 게 많은 중고막내]
- 부제: 먹는 것에 진심인 직장인이 행복해질 확률 -
3년 차 막내의 삶 4
직장인의 소소한 특권이 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직장인이 되어서야 기쁘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랄까. 회사 복지가 좋아 내부에서 VR 게임을 하고 안마의자에서 낮잠을 자거나 하는 것 말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혜택 같은 거다. 업무에 지친 직장인들에게 활력이 되어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예를 들면 사무실이 맛집 많은 동네에 있는 것, 창문 너머 산이나 강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있는 것, 출퇴근길에 예쁜 풍경을 볼 수 있는 것 같은 거다.
혜택은 직장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찾을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흔히들 말하는 인스타 명소와 맛집이 몰려있는 곳 근처에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 주변은 한옥과 현대적인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공간도 있고, 곳곳의 문화공간에선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일터에서 나와 몇 분 걸어가면 TV나 SNS에 소개된 식당과 블루리본 배지를 단 식당도 심심찮게 보인다. 가끔 드라마를 촬영하러 오는 카페나 소품 샵에 들러 점심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퇴근 시간까지도 기분 좋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착각)이 든다. 연예인이 진행하는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아는 식당이 나오는 것도 묘미다. 이건 여담인데 그럴 때마다 ‘어, 저 식당 선배들이랑 가봐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그 옆 식당이 찐인데, 잘못 찾아갔네.’ 라던가, ‘이제 저기 사람 많아지겠네.’ 따위의 생각을 한다.
나와 선배들은 먹는 일에 매우 진심인 편이다. 우릴 보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월등히 더 높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맛있는 음식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 한 명이, “우리 오늘은 뭐 먹을까?”라고 물꼬를 트면 각자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도출된 결과가 지극히 마음에 들면 오전도 행복하고, 점심시간도 행복하고, 오후도 나름 괜찮다. 남들은 시간 내서 가는 식당을 걸어서 금방 도착하고 웨이팅 없이 식사할 수 있는 건 명백히 근무지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 복지다. 물론 함께하는 사람들이 죽이 잘 맞아야 온전히 누릴 수 있긴 하지만.
내가 근무지에서 찾은 행복의 키워드는
(1) 맛있는 음식 (2) 예쁜 공간, (3) 함께 정도로 추릴 수 있다. 맛있고 예쁜 공간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 점심시간 혹은 퇴근 후 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함께’라는 키워드가 내키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런 경우는 혼자 전시회를 간다든지 공간 자체가 예쁜 카페에서 시그니처 메뉴를 먹으며 사진을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 그것도 아니면 친구들을 초대하는 방법도 있고.
언젠가 나를 힘들게 했다던 선배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일을 하면서는 행복할 수 없어요.”
“…. (듣는 중)”
“그럼 이렇게 맛있는 거 먹고 못 가본데 가보고 하면서 행복을 찾아야지 어떡해요.”
맞는 말이다. 맛있는 걸 먹고 못 가본 곳을 가보면 행복을 느낀다는 말에 공감한다. 기분 탓인가 일하다가 가면 이상하게 더 좋은 것 같다. 참고로 선배는 먹고 노는 일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월급을 받은 날은 안 가본 곳을 찾아 점심을 먹고자 했고, 근처 핫플레이스는 꿰뚫고 있었다. 덕분에 유명하다는 곳은 많이 가보았는데 사실 그때는 그렇게 즐기진 못했다. 공간만큼이나 함께 하는 사람도 중요하니까. 아마 선배도 그랬을 테지만. 뭐, 일하면서 기쁨을 찾을 수 없다면 선배 말처럼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다. 그는 직장 근처에서 문화생활을 하고 맛집에 출석 도장을 찍음으로써 행복을 찾았다. 물론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겠지만 선배에겐 본인 일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 역시 선배들과 막역해지기 전엔 친구들을 불러 가보고 싶었던 공간을 둘러보곤 했다. 근처 미술관에도 가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퇴근 후 시간을 풍성하게 보냈다. 그러면 오늘 얼마나 지쳐있던지, 내일 할 일은 또 얼마나 쌓여있는지에 대한 걱정은 잦아들었다. 매력적인 공간에서 일한다는 건 정말 특권이 맞다. 누릴 수 있는 혜택을 포기하는 건 본인의 선택이지만, 일-집-일-집만 반복하는 건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뭐?! 아직도 그걸 안 먹어봤다고??!!!
선배들보다 근무 기간이 짧다 보니 그들이 가본 곳 중에 가보지 못한 데가 많다. 내가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도 “뭐?! 아직도 그걸 안 먹어봤다고?”와 같은 것이다. 선배들은 내가 먹어보지 못한 메뉴가 있으면 곧바로 식당에 데려간다. 그럴 때마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데다가, 못 먹어 본 것도 이렇게 많다니! 대학을 졸업하고 맛집을 가보면 얼마나 가 보았을까. 기껏해야 친구들과 유행한다는 식당을 찾아 긴 줄을 서서, 들어가기도 전에 지친 기억이 전부다.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니, 먹는 일에 진심인 리더, 선배들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미식가가 다 되어간다. 그들이 데려간 곳 중 못 먹는 걸 파는 데를 제외하면 어디를 가나 최고였다. 몇 주전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숙성 목살, 필운동의 스테이크&매시 포테이토, 정해진 양만 판다는 반반 통닭까지….!
아주 부수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무실 위치가 주는 장점은 사람을 생기 있게 만들기도 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몸에 활기가 돈다. 회식 메뉴를 정하는 것만 빼면 직장에서의 음식 얘기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딴소리지만 왜 메뉴 선택은 오롯이 막내의 몫일까. 어차피 원하는 메뉴가 나올 때까지 물어보면서.)
아, 너무 먹는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이외에도 내가 생각하는 장점은 많다. 봄이면 벚꽃 길을 걷고 매일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도 근무 환경 질을 높인다. 가을에 가로수 길을 산책하는 것, 따뜻한 조명이 켜진 한옥 카페들을 보며 퇴근하는 길도 참 좋다. 직장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란 게 별것 없다. 이렇게나 소소한 것들이 지친 직장인에게 희열을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