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막내의 혼란
[충격! 착한 척하지 마(2)]
-부제: '착한 척하지 마' 사건 이후 배운 것-
중고 막내의 혼란
팀장님의 '착한 척하지 마' 발언에서 시작된 사건은 누군가에게 우스워보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충격만큼 배운 점도 많다. 일단 신입 시절, 유독 싫은 소리를 하는 게 힘들었던 것은 ‘과한 눈치 보기’와 ‘소통 능력 부족’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든 상대가 타격을 입는 말을 해야 한다면 눈치를 볼 게 아니라, 예의를 갖춰 필요한 말만 담백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분은 다소 상할지 몰라도 이해함은 있을 거다. 일과 일로 만난 사이라면 더더욱. 아쉬운 소리도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긴 하다. 경력이 쌓이면 점차 자연스러워진다.
정확한 전달이야말로 매끄러운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혹 그 문제가 파트너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을지라도 가감 없이 상황을 전달하고 조율해야 한다. 그래야 또다시 미안한 일이 발생하지 않고 상황도 매끄럽게 갈무리된다. 직장인이라면 반드시 피할 수 없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만 해도 정확하게 지시받아 일을 수행하는 것만큼 마음 편한 건 없다. 파트너도 그랬을 텐데…. 마음을 너무 몰라줬다. 당연한 거지만, 파트너와의 합이 맞으면 맞을수록 누구보다 편한 건 담당자 본인이다.
짐작건대 팀장님이 여린 막내한테 착한 척하지 말라는 소리를 한 일도 쉽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정신을 번쩍 차린 것처럼 다소 꺼내기 곤란할지라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정확한 단어일수록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래야 변화가 생기니까. 3년 차 중고 막내의 짬으로 이제는 해야 할 말을 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터득했다. 아직 눈치를 살피긴 하지만, 그래도 선배들이나 리더, 파트너가 들어야 할 말을 명확히 하는 건 좀 익숙해진 것 같다.
하나 더 따지고 들자면
일에는 언제나 우선순위가 있고, 알맞게 시간 분배를 해두어야 한다. 나는 원고 내용에만 집중한 나머지 시간을 한 곳에만 할애했다. 순위를 두자면 먼저 디자인을 짜서 큰 틀을 잡아두고, 원고 내용과 일러스트를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후에 분량에 맞게 글을 다듬고 오탈자나 내용상의 오류를 찾는다. 이 모든 과정의 전제가 되는 것이 바로 내용을 포괄하는 큰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1년간의 활동이 통일성 있게 읽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일련의 과정을 일하면서 터득했다. 아무래도 이런 것까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자료에 의지해 기획안을 잡고, 스케줄을 세우고 바쁘게 원고를 써 내려가긴 했는데, 감을 모르니 한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써버렸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후임이 들어오게 되면 이런 과정을 꼭 알려줄 예정이다. 물론 그도 직접 해봐야 무슨 말인지 깨닫긴 할 테지만.
이 이후부터 소식지든 애뉴얼 리포트든 이 악물고 일했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정확한 의사 표현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힘썼고, 파트너 의견을 수용하기 위해 애썼다. 원고 내용도 더 신경 쓰고 그 내용에 맞게 적절한 사진 및 일러스트를 어떻게 배치할지 구상했다. 그렇게 완성한 시안은 내가 봐도 마음에 들었다. 사건 직후 소식지 발행 작업을 하는 나를 보며 팀장님이 한마디 했다.
“그래, 일은 그렇게 하는 거야. 감 좀 잡았어?”
그의 말이 꼭 ‘일은 이렇게 배우는 거야’라고 들렸다. 나는 또 이렇게나 모진 과정을 겪고 나서야 일하는 방법을 배웠다. 원망에 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천재가 아니고서 ‘충격이 클수록 실력은 확실히 느는 법’이라고 고쳐 생각하기로 했다.
그 해 애뉴얼 리포트 제작이 유난히 어려웠던 건 내 약점을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기분을 살피느라 하고 싶은 말도 잘하지 못하던 성격이 일하면서도 티를 내버렸다. 소통 방법과 대처 능력도 미숙해서 뚝딱거리는 자신을 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무엇보다 짧은 생각으로 주변을 오히려 곤란하게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팀장님 말을 빌려 ‘착한 척’ 때문에 제일 힘들어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희망적인 사실은 약점을 직시하면서 개선해야 할 영역도 많이 찾아냈다는 점이다. 고질병인 눈치 보기, 필요한 말을 조리 있게 전달하는 방법, 일의 순서를 따져가며 시간을 분배하는 법, 의견을 절충하는 방법 등등. 이들을 능숙히 다루지 못해 생긴 문제라는 걸 배웠으니, 이제부터 단련하면 됐다. 하나 더 보태자면, 해본 적 있는 일에는 매번 겪어보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차례 소식지 작업을 통해 조금은 손에 익은 일에서 큰코다친 것처럼, 익숙해진 업무에는 늘 새로운 과제가 생긴다. 그래도 하면 할수록 어떤 것을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꼭 들어가야 하는지는 한층 잘 볼 수 있다. 실수하면 또 하나 배웠다 치자. 그리고 반복하지 않으면 레벨이 높아지는 거다. 벌써 몇 개를 배웠는가.
어떤 모양이 되었건, 그때 팀장님이 꺼낸 말은 필히 해야만 하는 말이었음을 인정한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기 전까지 절대 자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뿐 아니라 남에게까지 해가 되는 특성을 고칠 기회라면, 나쁘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젠 필요한 말은 꼭 할 수 있도록 성격도 좀 바뀌었다. 상대방이 더 난처해지지 않기 위해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결과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어쨌든 나한테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본인이 가진 문제를 돌아볼 기회가 어디 흔한가. 아마추어 티를 좀 더 벗어내기도 했고. 마무리까지의 과정이 좀 고되었을지 몰라도 그 일을 기점으로 계단 서너 개를 한 번에 밟아 오른 기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의 능숙도를 그래프로 그리면 직선으로 상승하는 모양이 아니라 가로 폭이 넓은 계단 모양일 거다.
아무 반응 없이 직진하다 별안간 쑥(⬆️), 주춤하며 직진하다 또 갑자기 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