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께선 내가 항인지질항체가 양성인 것이 반복 유산의 원인일 것 같다고 하셨다. 항인지질. 처음 듣는 단어에 갸우뚱한 표정을 짓자 원장님께선 편한 말로 풀어 설명해 주셨다. “이게 양성이면 임신했을 때 몸에서 혈전을 만들어서 아기한테 가는 산소를 막아버려요. 그래서 유산이 되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아 진짜 나한테 원인이 있었구나.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들이 스쳐갔다.
원장님께서는 나중에 다시 임신했을 때 약 먹고 주사 맞으면 되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항인지질항체증후군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무시무시한 내용들이 많이 나와서 심각하게 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임신이 문제가 아니라 이 항체를 갖고 있는 게 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두려웠다.
나중에 대학병원 류마티스 내과 진료도 받아보며 알게 된 거지만 항인지질항체가 양성이라고 해도 증상이 없으면 항인지질항체증후군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행히 내 경우는 수치가 많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맘카페를 둘러보니 나처럼 항인지질 양성으로 유산을 겪은 사람들이 꽤 많아서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검사하며 또 처음 듣게 된 것이 nk 세포수치. 난임 쪽에서는 태아 살해 세포라는 무서운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 수치가 높으면 임신유지가 어렵다고 한다. 나도 nk수치가 약간 높아서 나중에 재임신을 했을 때는 콩주사나 면역글로불린 주사를 함께 맞기로 했다. 내가 찾아온 이 병원이 적극 처방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분위기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병원의 방침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 시험관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시험관에 대해서도 원장님께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내 경우 착상은 잘 되는 편인 것 같아서 무엇보다 유산 확률이 궁금했다. 원장님께서는 자연임신보다 시험관이 유산확률이 낮기는 하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바로 “저 시험관하고 싶어요!”라고 말씀드렸다. 시험관을 한다고 유산확률이 0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확률을 줄여볼 순 있지 않을까.
이 병원에 습관성 유산 검사를 하러 온 환자들은 검사가 끝나면 시험관은 큰 난임병원으로 옮겨서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내 유산의 원인을 알게 해 준 이곳에 남아 시험관을 하기로 했다. 첫 시험관을 위해 생리 3일 차에 병원을 찾았고, 말로만 듣던 자가 주사들을 왕창 받아왔다. 난자를 여러 개 얻기 위한 과배란 주사들이었다. 스스로 배에 주사를 놓는다는 게 정말 막막하고 무서웠지만 막상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천천히 따라 해 보니 생각보단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놓기 때문에 주사가 들어가는 타이밍을 알 수 있어서 공포심이 덜했다. 다만 내 항인지질 때문에 추가로 받은 크녹산 주사는 내가 최대한 천천히 놔도 진짜 명성대로(?) 꽤나 아팠다. 멍주사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이 주사는 결국 내 배를 얼룩덜룩 피멍으로 물들여놓았다. 배꼽티 입을 거 아니니까 큰 상관은 없었다.
내 경우 크녹산 주사보다도 며칠간 과배란 되는 과정이 더 거북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막판에는 배가 더부룩해서 어서 난자들을 뽑아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기다림 끝에 채취일이 잡혔다! 채취 후 나온 난자는 19개. 다낭성이면 몇십 개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길래, 나도 내심 기대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나와준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난자가 많이 나와도 질이 좋지 않으면 말짱 꽝이기 때문에 이제는 난자랑 정자가 잘 수정될지가 문제였다. 배아에는 3일 배양과 5일 배양이 있는데 몸 밖에서 3일 버틴 배아보다는 5일간 버틴 배아가 당연히 튼튼하고 좋기 때문에 5일 배양이 나와주길 바랐다. 채취를 한다고 해서 5일 배양이 무조건 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장님께서는 5일 후 바로 신선 이식을 해보자고 하셨다. 신선이식은 수정시킨 배아를 바로 그 차수에 이식하는 걸 말하는데 5일 뒤라 하셨느니 5일 배양을 이식한다는 걸 의미했다.
‘아니 아직 채취만 했는데 어떻게 5일 배양이 나올 거라 확신하시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내 나이가 30대 초반이라 그랬던 건가 싶다.
난자를 채취한 후에는 복수가 차지 않게 이온 음료를 많이 마시면 좋다고 해서 이온음료를 박스째로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남편도 이온음료를 덩달아 같이 마시면서 웃기게도 둘 다 이온음료에 중독되었다. 물먹는 하마처럼 이온음료를 거덜내면서 이식을 위한 몸을 만드는 데 최대한 집중했다.
그런데 그렇게 중독자처럼 이온음료를 달고 살았는데도 배가 나날이 불러왔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땐 내 밑을 칼로 도려내는 불쾌한 느낌도 났다.
‘설마 복수가 차고 있는 건가? 이런 컨디션으로 이식을 할 수 있을까?’
며칠 뒤 이식날, 뽈록한 내 배를 보시곤 선생님께서 당황하시며 바로 초음파와 피검사를 진행하셨다.
“아 오늘 이식은 어려울 것 같네요.”
역시나 내 배에는 복수가 가득 차 있었다. 이게 기다린다고 해서 순식간에 빠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시술을 통해 빼내기로 하였다. 맘카페에서 글로만 읽어봤던 복수천자! 를 하기 위해 베드에 누웠다. ‘복수 뽑는 건 보통 난자 몇십 개 나온 사람들이 하는 것 같던데… 나는 그 정돈 아닌데 왜 복수가 차지?’ 조금 억울했다. 나중에 듣기론 난자가 두 개 나왔는데도 복수천자를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냥 운인가 보다.
원장님께서 엄청 큰 바늘로 내 배를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한 군데를 쿡 찔러서 복수를 빼내기 시작했다. 관을 따라 꼴꼴꼴.. 큰 페트병이 가득 찰 정도로 복수가 나왔다. 저 정도 복수를 배에 안고 지내면서 이게 복수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면 나도 참 어지간히 둔하다 싶었다. 복수를 다 빼고 나니 몸이 많이 가뿐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이식은 미뤄졌지만 몸 상태가 좋을 때 이식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별로 아쉽지 않았고, 당분간은 회복에만 집중하며 이식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배아 개수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