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이보와 얘기했다.
이십 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던 시절, 넘치는 기운을 감당할 수 없어 주변에 스크래치를 많이 내고 다니던 나는, 한 살 어린 이보로부터 태도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배웠다.
그에게는 우아한 유머로 상대를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같이 웃는 와중에 내 행동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의 말투가 참 부러웠고, 아직도 이보만큼 그 방면에 뛰어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두어 달 같이 놀았던 인연이 14년째 이어지는 걸 보면 인연이란 건 노력보다 그저 내 인연을 만나는 게임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물론 맥락에 따라 다양한 정의를 지닌 단어지만 나는 아직 후자 밖에 할 줄 모른다. 이런 인연들과는 만나는 순간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씨를 뿌렸다는 생각이 들고, 이 느낌은 대게 상호적이다.
이렇게 내가 뿌린 씨를 품고 사는 인연들을 가끔 들여다보고, 그들이 내게 심은 씨도 가꾼다. 시공을 굳이 가를 필요는 없지만 여행은 공간적, 독서는 시간적 씨 뿌리기라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시작은 중학생 무렵이었다.
어릴 적 나는 내가 장자를 읽으면 그도 나를 쳐다본다고 믿었다.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을 우러러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마주 보고 관계 맺는 일이라 생각했고, 그리 생각해서 좋은 일이 많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내 삶에 개입하며,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그가 완벽한 스승이라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저 내 역사의 일부가 되어서 애틋한 것 같다.
이렇게 나를 시공간적으로 뿌려놓고 보내는 일상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재밌다. 친구들은 '넌 재밌다는 말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매일 아침 똑같이 그 자리에 있는 나무나 태양이 재밌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야, 근데 늙어가는 거 재밌지 않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인데 상황은 계속 바뀌잖아. 그런데도 나는 똑같은 사람이고, 또 다른 사람이야. 이거 너무 재밌지 않아?"
"어, 나는 늙는 거 별루야. 설교 계속해봐."
설교 계속하라는 말에 한참을 웃는다. 이보는 나에게 '너는 말투가 단언적이고 설교하는 버릇이 있으니 항시 주의하라'고 내게 설교하곤 했다. 이런 말을 14년째 들어도 기분 나쁘기는커녕 매번 웃기기만 한 것도 신기할 따름. 덕이 높은 사람의 말은 잘 먹히는 특징이 있는데, 이보는 덕망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언행이나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그레브에 다시 안 와? 젊은 날을 '재현'해야지."
"젊은 날 '재현' 오 마이갓... 듣는 '오늘' 서운하게 그런 말을 하냐."
"왜?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그래. 어떻게 될지 모르지.
스웨덴에 심어놓은 나의 씨 하나는 얼마 전 노벨상위원회 디너 간다고 들떠있었고, 할리우드에 있는 다른 씨 하나는 앤더슨 팩이랑 오전 내내 리허설했다며 자꾸만 사진을 보내온다. 하아... 앤더슨 팩은 좀 많이 부럽네.
아암. 어떻게 될지 모르고 말고.
이보 얘기를 하다 보니 자그레브 사람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른다. 이 얘기를 한동안 좀 해 봐야겠다. 이래놓고 또 언제 그만둘지 모르겠지만 시작은 해봐야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