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해질 무렵 토미슬라브 광장에 도착했다.
"이쪽이에요!"
깔끔한 차림에 뿔테안경을 쓴 콥찰리치. 그가 안내한 식당은 지하 동굴 컨셉의 레스토랑이었다. 퇴근하고 와인 한잔 하면서 편하게 밥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크로아티아는 왜 왔어요? 얼마나 있을 거예요? 오기 전에 어느 나라에 있었어요?"
"부다페스트 - 페치 - 사라예보 - 모스타르 - 두브로브니크 - 스플리트 - 자그레브."
"와우. 브라보."
"12월 9일까지 있을 거예요. 지도 보면서 가고 싶은 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매번 중서부 유럽만 보다 보니 발칸 쪽도 한번 보고 싶더라고요."
"우리는 우리가 발칸이라고 생각 안 하는데...(웃음)"
"납득이 가요. 특히 스플리트나 두브로브니크는 전혀 발칸스럽지 않죠. 근데 발칸 지역이 저에겐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모스타르 길거리에 울려 퍼지던 성당 종소리, 모스크 아잔 소리, 반쯤 누운 자세로 길거리에서 찐득한 커피 마시던 사람들... 하루는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이랑 야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한 집시 소년이 - 요즘은 '로마, roma'라고 부르지만 - 제 옆에 앉아있던 사람의 체바피(소시지같이 생긴 발칸반도 음식) 하나를 집어 먹더니 아무렇지 않게 제 갈길 가더라고요."
"완전 와일드한 곳이네요. 체바피 뺏긴 사람 괜찮았어요?"
"아니요.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 귀에 나지막이 속삭이더군요. '서브휴먼(subhuman, 인간 이하) 같으니라고...'"
"여기도 보스니아만큼은 아니지만 로마 인구가 꽤 될 거예요. 모스타르는 말만 들어봤지 가 본 적은 없는데 부럽네요."
"부럽긴요, 가면 되죠."
여행을 하다 보면 육감이 예민해진다.
이 사람을 믿을지 말지가 순간적으로 판단되고 그 예감은 웬만해선 어긋나지 않는다. 육감이 성성한 채로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한다. 그게 무너지면 육감도 꺼진다. 그런 날은 짧은 산책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나는 혼자 오래 여행하면서 주리主理보다 주기主氣적 세계관에 더 끄덕이게 되었다. 물론 어디 힘을 실어 보느냐의 문제지만.
콥찰리치는 내 예감을 벗어나지 않은 선한 인간이었다. 자그레브 토박이 콥찰리치를 만나는 바람에 낯선 도시에 펼쳐진 나의 일상은 매끄러웠고, 그의 도움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아무런 의도 없이 그냥 선하기 위해 선한 인간이었고, 그의 주변 또한 그런 사람들로 바글대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어. 10분 뒤에 도착해? 알았어."
"누가 와요?"
"어제 말한 제 친구요. 자그레브에서 예술 작업 하려면 이 친구 알아두면 좋아요."
-
10분은 무슨,
30분이 훌쩍 지나 작업복 차림으로 옷을 툴툴 털며 심드렁하게 등장한 루나. 깔끔한 범생 스타일의 콥찰리치와 대조적인 모습에 호기심이 치솟았고, 육감 신호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안녕? 난 슬라븐이야(루나 본명)."
늦게 온 데다 말투가 살짝 무례했지만 신호는 계속 초록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