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장을 했습니다.
김장하면서 깍두기도 담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전날은 레드랜즈(redlands)라는 곳에서 퍼포먼스를 했고요. 그래서 지금 기력이 달려서 글을 못 올릴 판이지만 그래도 뭔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있어서 하기로 한 일은 끝까지 하자 싶어 가지고... 간략하게 남겨 봅니다.
그럼 다시 루나 이야기로 돌아가서...
참고로 지난번 이야기는 콥찰리치와 저녁 먹다 루나가 등장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어, 안녕? 난 아찌야."
"반갑다. 넌 캘리그래피 하니?"
"어. 넌 그래피티 한다매? 니 친구가 너 유명하다는데 진짜야?"
"그래피티 씬에선 그렇지."
겸손과 절제가 몸에 밴 콥찰리치에게 이런 뻔뻔한 친구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근데 너네 둘은 어떻게 만난 거야? 어릴 때부터 친구야? 보통 친구들끼리 결이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너네는 분위기가 너무 다르네. “
진심 신기해서 묻는 나에게 루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나랑 비슷한 친구도 많고 다른 친구도 많아. 너는 비슷한 사람이랑만 놀아?"
"아니."
"그럼 나랑 다음 주 일요일에 벽 하나 같이 할래? 내 친구 집인데 내 동생도 같이 할 거야."
"그래!"
만난 지 10분 만에 함께 작업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쑥 올라오게 만드는 이 인간은 그 후로도 저렇게 툭툭 제안을 해왔고, 그 보다 더 매력적인 동생의 등장으로 셋의 관계는 단순 협업에서 우정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인사해, 내 동생 이보야."
"어, 안녕? 난 아찌야."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급히 비벼 끄며 악수를 청함) 어, 반가워. 형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언제 만났다고 얘기를 들었데(웃음)... 넌 담배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나 담배 안 펴."
"방금 손에 들고 있었잖아."
"저건 그냥 스트레스받을 때 피는 거고... 오늘 촬영이 좀 빡셌거든. 가끔 배부르거나, 심심하거나, 불안할 때 피는데... 원래 안 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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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때때로 피지만
원래는 안 피는 사람인 이보.
그는 노자가 소피스트로 환생한듯한 입담을 지니고 있었고, 묘하게 웃기면서 여운이 남는 말을 잘 내뱉곤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여행할 때 취약(vulnerable)한 상태로 돌아다녀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들도 그들의 섬세한 면면을 내게 쉬이 드러내 보이곤 했다. 이 상태는 마치 어린이였을 때의 나 같았는데, 이런 식의 관계 맺음은 지성적 판단보다 직관에 의존해 있었고, 대부분 나를 좀 더 안전하고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루나는 내가 자그레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재밌는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밥 사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장르별로 분류해서 내게 선물했다. 플레이리스트 공유하는 친구는 특별하다.
별거 없지만 소중했던 한 장면으로 마무리.
새벽 한 두시,
루나 친구의 전시 오프닝을 보고 집으로 셋이 터덜터덜 걸어가다 한 허름한 조각피자 집에 들렀다. 따뜻한 피자 한 조각씩 손에 들고 느릿느릿 걸으며 한입 베어 물고 맛있다고 깔깔대다가, 진지했다가, 실없는 소리를 새벽 길거리에 잔뜩 흩뿌리며 서로의 집으로 하나 둘 빠이빠이하고 헤어지던 많은 밤들.